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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도시 힐링 로맨스

가을 서점 — 제7화. 왜 그 책이었어요

2026.09.26 발행 · 전 8화
못 넘긴 책 앞에 마주 선 두 사람의 실루엣

"들어와요." 문시원이 겨우 말했다. "문 열어놨으니까."

나는 어두운 서점으로 들어갔다. 이 주 만이었다. 종이 냄새는 여전한데, 온기가 없었다. 그가 스탠드 하나를 켰다. 노란 불빛이 반쯤 빈 서가를 비췄다. 책들이 빠져나간 자리가 어둠 속에서 검게 벌어져 있었다. 빈 책장. 나는 그 텅 빈 칸들을 보며, 이 서점이 정말로 사라지려 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정리하시는 거예요?" 나는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네." 그가 상자 위에 손을 얹었다. "생각을 좀 했어요. 이 서점, 제가 지킬 자격이 있나. 노 선생님이 하시던 걸 흉내만 내는 거 아닌가. 저는 남 책은 골라주면서, 정작 제 책은 한 페이지도 못 넘기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무슨 처방을 해요."

"그건—"

"손님한테도 그랬잖아요." 그가 내 말을 잘랐다. 목소리는 조용했다. "손님이 흔들릴 때, 저는 물러섰어요. 처방도 마음 없이 던졌고요. 그게 처방하는 사람이 할 짓인가. 저는 그때 알았어요. 저는 이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남을 정해주려면 제가 먼저 서 있어야 하는데, 저는 몇 해째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 말이 아파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건 나한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남을 위해 수천 개의 문장을 쓰면서 자기 한 줄은 못 쓰는 사람. 우리는 정말 같았다.

빈 서가가 자꾸 눈에 밟혔다. 나는 이 서가가 처음 왔던 날 얼마나 빽빽했는지 기억했다. 천장까지 책이 꽂혀 있어서, 좁은데도 갇힌 느낌이 아니라 안긴 느낌이었다. 도시의 어떤 빌딩보다 그 좁은 서가가 나를 더 크게 품어줬다. 그런데 지금은 그 책들이 절반이나 빠져나가, 벽이 그냥 벽으로 보였다. 책이 없는 서가는 그냥 나무판이었다. 사람이 없는 도시가 그냥 콘크리트인 것처럼. 나는 이 서가가 다시 비면, 이 골목도 도시의 여느 빈 상가처럼 캄캄해질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가 상자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손님한테 드리려고 뺐어요. 마지막 처방이라고 생각하고. 이거 받고 나면, 저는 이 골목 떠날 거예요."

그가 책을 내밀었다. 나는 받아서 제목을 봤다.

『남의 책만 읽는 사람』.

✦ ✦ ✦

나는 그 제목 앞에서 얼어붙었다.

남의 책만 읽는 사람. 나는 카피라이터라서, 제목이 뭘 숨기는지 안다. 좋은 제목은 두 번 읽힌다. 한 번은 글자로, 한 번은 마음으로. 이 제목은 두 번째로 읽으면 이렇게 읽혔다 — 남의 마음만 읽어주고 자기 마음은 안 읽는 사람. 남은 처방하면서 자기는 못 처방하는 사람. 나는 그게 누구 얘기인지 단번에 알았다.

이건 나한테 주는 처방이 아니었다. 이건, 그가 자기한테 하려다 못 한 말이었다. 마지막 처방인 척, 그는 자기 이야기를 나한테 떠넘기고 떠나려는 거였다. 자기 입으론 못 하니까, 책 뒤에 숨어서. 나는 그가 물러선 문장을 또 한 번 알아봤다. 이 사람은 자기 이야기 앞에서, 늘 이렇게 뒤로 숨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오랫동안 지켜온 룰을 깼다.

우리는 서로에게 왜 그 책이 필요한지 묻지 않는 사이였다. 그가 처음 나한테 책을 건네며 말했으니까. 왜 필요한지는 안 물어요. 그 룰 덕분에 나는 여기서 캐물리지 않고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룰을 내 손으로 깼다.

"시원 씨." 나는 책을 내려놓고 그를 봤다. "이거, 시원 씨 얘기잖아요."

그의 눈이 흔들렸다.

"왜요." 나는 물었다. 처음으로. "왜 그 책을 저한테 처방해요? 아니, 왜 그동안 저한테 그 책들을 처방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마라, 느리게 읽어라, 돌아가는 길을 알아라. 그거 다… 시원 씨가 자기한테 하고 싶었던 말 아니에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래. 스탠드 불빛만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렸다.

"우리 이런 거 안 묻기로 했잖아요." 그가 겨우 말했다.

"그 룰, 오늘부터 안 지킬래요." 나는 말했다. "시원 씨가 떠나면 다시 못 물으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물을래요. 왜요. 왜 그렇게 남만 읽고, 자기는 안 읽어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육 년간 누구에게도 왜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왜냐고 묻는 건 상대의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는 일이고, 나는 늘 반대로 살았으니까. 사람들 사이에 문장을 세우고, 그 뒤에 숨어 사는 게 내 방식이었다. 광고 문안처럼, 딱 필요한 말만 정확히, 그 이상은 넘어가지 않기. 그런데 오늘 나는 처음으로, 문장을 걷어내고 사람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게 무서웠지만, 이 사람이 떠나는 것보다는 덜 무서웠다.

"손님은." 문시원이 힘겹게 말했다. "왜 저한테 그걸 물어요. 손님은 곧 도시로 돌아갈 사람이잖아요. 이런 거 물어봐야, 서로 아플 뿐인데."

"그러니까 묻는 거예요." 나는 말했다. "아플까 봐 안 물으면, 우리 둘 다 계속 물러서기만 하잖아요. 시원 씨는 서가 뒤로, 저는 도시로. 저 그렇게 물러서면서 육 년 살았어요. 이젠 안 그럴래요."

✦ ✦ ✦

그는 스탠드 옆 낡은 의자에 앉았다. 오래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 선생님이라고, 이 서점 주인이 계셨어요." 그가 말했다. "제 스승이에요. 제가 잡지사에서 다 타버려서 이 골목에 흘러들었을 때, 그분이 저한테 책을 처방해주셨어요. 멈춰도 되는 사람, 이라는 책이었어요." 나는 숨을 삼켰다. 그건 내가 첫 주에 받은 책이었다. "그 책 한 권이 저를 살렸어요. 그래서 저는 여기 눌러앉았고, 그분한테 처방하는 법을 배웠어요."

"삼 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분이 갑자기 가셨어요. 저는 몰랐어요. 그분이 아픈 걸. 매일 봤는데도 몰랐어요. 남 마음은 그렇게 잘 읽는다면서, 저를 살려준 분이 시들어가는 건 못 읽었어요. 그때 알았어요. 저는 가짜라는 걸. 남은 읽으면서 정작 옆 사람은 못 읽는 사람. 처방이라는 게, 결국 제가 못 한 걸 남한테라도 해주려는 속죄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들면 처방을 못 하겠어요. 그래서 가끔 문을 닫았어요."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육 년 전 내가 떠올랐다. 이한 선배가 쓰러지던 날. 나도 몰랐다. 선배가 몇 주째 새벽까지 남는 걸 봤으면서, 내 마감에 치여 못 봤다. 매일 옆자리에 앉았으면서, 선배가 꺼져가는 걸 못 읽었다. 나도 그날부터, 남을 위한 카피만 쓰고 내 글은 한 줄도 못 쓰는 사람이 됐다.

"저도요." 나는 말했다. "저도 그래요. 저도… 한 사람을 못 읽어서 잃었어요. 제 사수였어요."

문시원이 나를 봤다.

"육 년 전에요." 나는 처음으로 그 얘기를 소리 내어 했다. "큰 캠페인 마감이었어요. 선배가 며칠째 안 자고 일했는데, 저는 제 몫 하느라 못 챙겼어요. 어느 날 선배가 쓰러졌고, 다시 못 일어났어요. 저는 그날 이후로, 남을 재촉하는 문장을 쓰면서 살았어요. 지금 시작하세요, 늦기 전에. 그런 문장들. 선배를 죽인 게 그런 문장들인데, 저는 그걸 팔면서 살았어요."

"그 선배가." 문시원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혹시… 성함이."

"이한이요." 나는 말했다. "이한 선배."

문시원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오래 나를 봤다. 무언가를 맞춰보는 눈으로. 그러더니, 아주 천천히 말했다.

"…그 사람, 여기 단골이었어요."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으로 들으니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한 씨." 문시원이 말했다. "노 선생님이 아끼던 손님이었어요. 저도 몇 번 처방했고요. 육 년 전에… 다른 손님한테 소식을 들었어요. 그때 노 선생님이 많이 우셨어요. 노 선생님 가시기 한참 전이었죠." 그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생전에 그랬어요. 회사에 아끼는 후배가 하나 있다고. 재능은 넘치는데 자기를 너무 안 챙기는 애라고. 언젠가 지치면, 이 서점을 알려주고 싶다고. 여기서 책 한 권 받으면 좀 쉴 텐데, 하고."

나는 숨이 멎었다.

"그 후배가." 문시원이 나를 봤다. 처음으로, 나를 처음부터 다시 보는 눈으로. "손님이었어요?"

✦ ✦ ✦

나는 대답 대신 눈물이 났다.

그러니까 우연이 아니었다. 내가 이 낯선 골목으로 흘러든 것. 하필 이 서점을 고른 것. 그건 순전한 우연이 아니라, 선배가 남긴 길이었다. 선배가 언젠가 나한테 알려주고 싶어 했던 곳. 내가 번아웃으로 도망칠 동네를 고르다 무의식에 남은 그 말, 지치면 이런 데 가서 책 한 권 받아 와. 선배는 죽어서도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였다. 자기가 살아서 못 한 처방을, 이 서점을 통해 나한테 해준 거였다.

"선배가." 나는 겨우 말했다. "저를 여기로 보낸 거였네요."

"저는 몰랐어요." 문시원의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손님이 그 후배인 줄. 저는 그냥 지친 손님이라고 생각하고 처방했어요. 이한 씨 얘기는 한 번도 안 했잖아요, 우리. 묻지 않기로 했으니까."

"저도 몰랐어요." 나는 말했다. "선배가 여기 단골이었다는 것도, 처음엔 몰랐어요. 삼 화 그 책에서 선배 밑줄을 보고서야 알았어요. 『가을의 사람』. 그 안에 선배 연필 자국이 있었어요."

문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 이한 씨가 여기서 읽던 헌책이에요. 그 사람이 좋아하던 책이라 서가에 그냥 뒀어요. 그걸 손님한테 처방한 건… 정말 우연이었어요. 손님한테 필요한 책이 그거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우연이었지만, 우연이 아니었다. 선배가 읽던 책이 나한테 처방됐고, 그 밑줄이 나를 흔들었고, 그래서 내가 여기 이렇게 있었다. 우리 셋이 — 나와 문시원과 죽은 선배가 — 이 작은 서점 안에서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선배가 아끼던 후배와, 선배를 알던 서점지기가, 선배가 읽던 책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이건 사람이 짠 게 아니었다. 이건, 떠난 사람이 남기고 간 처방이었다.

나는 오래 참았던 슬픔이 그제야 다른 모양으로 풀리는 걸 느꼈다. 육 년간 선배는 나한테 죄책감이었다. 못 지킨 사람, 내 부주의가 놓친 사람. 그 무게로 나는 늘 고개를 숙이고 살았다. 그런데 오늘, 선배는 죄책감이 아니라 선물이 됐다. 선배는 죽어서까지 나를 챙겼다. 지치면 여기로 오라고, 자기가 아는 가장 따뜻한 곳으로 나를 미리 데려다 놨다. 그건 원망할 일이 아니라 고마워할 일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선배를 죄책감 없이 떠올릴 수 있었다. 슬프긴 했다. 그런데 그 슬픔은 나를 짓누르는 슬픔이 아니라, 나를 안아주는 슬픔이었다. 애도가 회복이 되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이었다.

"그러니까 시원 씨." 나는 눈물을 닦고 말했다. "떠나지 마요. 선배가 시원 씨한테 저를 부탁한 것 같잖아요. 시원 씨가 저를 살렸어요. 아무것도 하지 마라, 느리게 읽어라, 그 처방들이 저를 살렸어요. 시원 씨는 가짜가 아니에요. 저를 살렸는데 어떻게 가짜예요."

"…저는 저를 못 살려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남은 살려도, 저 한 사람을 못 살려요."

나는 그 말에 오래 그를 봤다. 그리고 알았다. 이 사람은 지금 나한테, 육 년 전의 나를 보여주고 있었다.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 사람. 그 사람을 어떻게 살리는지,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를 살린 게 처방이었으니까. 그럼 그를 살리는 것도 처방일 거였다. 다만 이번엔, 그가 받는 쪽이어야 했다.

✦ ✦ ✦

문득 휴대폰이 울렸다. 오세혁이었다.

다인아, 내일까지야. 미안한데 나도 더는 못 미뤄. 답 줘.

내일까지. 도시의 시한이 서점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나는 그 문자를 한참 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시한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돌아가는 길』이 말해줬다. 돌아갈 곳을 아는 사람은, 지금 어디 서 있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고. 나는 도시로 돌아가는 길을 안다. 그러니까 지금은, 여기 있어도 됐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답은 내일 하기로 했다. 오늘 밤엔,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책상으로 갔다. 몇 해째 펼쳐진 채 못 넘긴 그 책 앞으로. 스탠드 불빛 아래, 그 책은 늘 같은 페이지에서 멈춰 있었다. 노 선생이 그에게 남긴 마지막 처방. 넘기면 스승을 진짜로 보내는 것 같아서, 그가 삼 년째 못 넘긴 페이지.

스탠드 아래 펼쳐진 낡은 책 위에 나란히 얹힌 두 사람의 손

나는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펼쳐진 페이지 위에 손을 얹었다. 오래된 종이가 손끝에 서걱했다.

"시원 씨."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이 다음 장, 저랑 같이 읽어요."

그가 나를 봤다. 삼 년째 아무도 못 건드린 그 책을, 내가 만지고 있었다.

"혼자 못 넘기면." 나는 말했다. "같이 넘기면 되잖아요. 남 처방은 혼자 하면서, 자기 책은 왜 혼자 넘기려고 해요. 이번엔 제가 옆에 있을게요."

그는 오래 나를 봤다. 삼 년째 아무도 못 건드린 책을 낯선 손님이 만지는데, 그는 밀어내지 않았다. 밀어낼 힘도, 밀어낼 마음도 없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 그 페이지를 대신 만져주길 삼 년째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처방하는 사람도, 처방받고 싶은 밤이 있는 법이니까.

"이거 넘기면." 그가 조용히 말했다. "노 선생님을 진짜 보내는 것 같아서요. 이 페이지에 멈춰 있으면, 아직 안 끝난 것 같은데."

"안 끝나요." 나는 말했다. "다음 장을 읽는다고 끝나는 거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예요. 페이지를 넘겨야, 그 사람 이야기가 계속되는 거예요. 여기서 멈춰 있으면, 노 선생님 이야기도 여기서 멈춰버리잖아요. 시원 씨가 넘겨줘야, 그분이 남긴 게 계속 살아요. 저 여기 그거 배우러 왔어요. 멈추는 게 지키는 게 아니라는 거. 넘기는 게 보내는 게 아니라는 거."

그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리고 그의 손이, 천천히, 내 손 옆으로 왔다. 삼 년 만에, 그 페이지 위에 두 사람의 손이 나란히 얹혔다. 우리는 아직 페이지를 넘기진 않았다. 다만 넘길 준비를 하는 두 손이, 스탠드 불빛 아래 나란히 놓여 있었다. 밖에선 도시가 여전히 빨랐다. 지하철이 지나가고, 배달 오토바이가 골목을 스치고, 누군가의 야근 불빛이 창마다 켜져 있었다. 그런데 이 작은 서점 안에서만은, 시간이 삼 년 만에 겨우 반 장, 다음 페이지 쪽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제8화는 2026.09.27 저녁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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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은 창작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상호·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삽화는 AI로 생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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