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서점 — 제6화. 빈 책장

토요일이 한 번 빈 채로 지나갔다.
서점은 계속 불이 꺼져 있었다. 나는 주중에 골목을 두 번 지났는데, 그때마다 유리문의 쪽지는 그대로였다. 당분간 처방을 쉽니다. 그 다섯 글자가 며칠째 같은 자리에 붙어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당분간이라는 말이 점점 영영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결국 그냥 지나쳤다. 내가 문을 두드릴 자격이 있나. 도시로 반쯤 발을 걸친 내가.
그사이 도시는 더 빨라졌다. 오세혁은 이틀에 한 번꼴로 문자를 보냈다. 재촉은 아니었다. 다정한 확인이었다. '생각해봤어?' '자료 봤지?' '팀 자리 하나 비워뒀다.' 그리고 어제는 이렇게 왔다.
다인아, 다음 주 초에 위에 명단 올려야 해. 이번 주말까지는 답 줘야 내가 움직여.
이번 주말까지. 시한이 손에 잡히는 거리로 좁혀졌다. 나는 그 문자를 지하철에서 읽었다. 퇴근길도 아닌데 왜 지하철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집에 있기가 답답해서 어딘가로 실려 가고 싶었다. 사람들이 몸을 밀착한 채 각자의 화면을 봤다. 아무도 서로를 보지 않았다. 나는 그 익명의 무리 속에서, 문득 서점의 그 좁은 온기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거기선 문시원이 나를 봤다. 이름은 안 물어도, 나를 봤다. 여기선 아무도 나를 안 봤다. 그게 도시의 자유고, 그게 도시의 외로움이었다.
시한이 정해지자 오히려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답이 정해져야 편해질 줄 알았는데, 답을 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답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나는 시한을 미루고 싶어서 자꾸 딴 데를 봤다. 오세혁이 보낸 계약서 초안을 열었다가 닫고, 팀 구성안을 봤다가 접고. 몸은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데, 어딘가가 자꾸 제동을 걸었다. 그 제동이 어디서 오는지,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서점이었다. 이 주째 불 꺼진 그 서점이, 내 결정에 자꾸 손을 얹었다.
나는 카피라이터라서, 답이 정해지지 않은 카피가 얼마나 사람을 갉아먹는지 안다. 마감은 다가오는데 한 줄이 안 나올 때. 그럴 때 나는 늘 억지로라도 한 줄을 뽑아 넘겼다. 그게 프로였다. 그런데 이번엔 억지로 뽑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인데, 마감에 쫓겨 아무 줄이나 뽑아 넘길 순 없었다. 그건 육 년간 내가 저지른 실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광고주 다루듯 다루며 살았다.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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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낮에 유나를 만났다.
먼저 보자고 한 건 유나였다. 한동안 안 봤으니 얼굴이나 보자고. 우리는 회사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유나는 여전히 빨랐다. 앉자마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반쯤 비우고, 노트북을 열었다 닫았다, 전화가 오면 "잠깐만" 하고 받고, 그러면서도 내 얼굴을 살폈다.

"너 얼굴 진짜 좋아졌다." 유나가 말했다. "쉬는 게 이렇게 티가 나냐. 나 봐, 나. 어제도 세 시에 잤어."
"많이 힘들어?" 내가 물었다.
"힘든 게 디폴트지 뭐. 근데 나 요즘 이상해." 유나가 잔을 만지작거렸다. "일이 힘든 건 원래 그런 건데, 요즘은 힘든 게 뭔지도 모르겠어. 그냥 다 무감각해. 야근을 해도 아무 느낌이 없고, 주말에 쉬어도 쉰 것 같지가 않고. 나 이거 좀 위험한 거 같지 않냐?"
나는 대답을 못 했다. 왜냐하면 그건 육 년간의 나였으니까. 힘든 것도 못 느끼는 상태.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알았다. 그건 힘들지 않은 게 아니라, 너무 힘들어서 감각을 꺼버린 거였다. 나는 그 스위치가 꺼진 채로 육 년을 살다가, 어느 날 아무것도 못 쓰게 됐다.
"유나야."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거, 무감각한 거… 그거 나 그랬어. 회사 그만두기 직전에."
유나가 나를 봤다. 잠깐, 아주 잠깐, 유나의 빠른 눈이 느려졌다.
"근데 넌 그만뒀잖아." 유나가 말했다. 그 말은 얼마 전 통화에서도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는 지나가듯 흘렸는데, 오늘은 눈을 보고 말했다. "난 그것도 못 하겠더라. 넌 그만두는 걸 했잖아. 난 그 무감각한 게 무서운 줄 알면서도, 못 멈춰. 멈추면 뒤처질까 봐. 멈추면 내가 아무것도 아닐까 봐."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건 반년 전의 나였고, 또 어떤 면에선 지금의 나이기도 했으니까. 나도 지금 도시로 다시 튕겨 돌아갈까 말까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멈춘 게 무서워서.
"근데 있잖아." 유나가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며 말했다. "나 방금 좀 웃겼어. 너 그 서점 얘기할 때 있잖아. 아까 오다가 잠깐 했잖아, 그 책 골라주는 서점. 그 얘기할 때만 네 목소리가 느려지더라. 알아? 딴 얘기 할 땐 너 예전처럼 빨라. 근데 그 서점 얘기만 나오면 말이 느려져. 나 그거 보면서, 아 나는 저렇게 느려지는 게 뭔지도 까먹었구나 싶었어."
나는 멈칫했다.
"부럽더라." 유나가 웃었다. 부러움을 감추려는 웃음. "네가 쉬는 게 부러운 게 아니라, 네가 그렇게 느려지는 게 부러워. 나는 이제 뭘 얘기해도 이 속도야. 느려지는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어."
느려지는 스위치. 나는 그 말을 카피라이터의 귀로 들었다. 정확한 관찰이었다. 유나는 나를 정확히 읽었다. 나는 남을 읽는 게 직업인데, 오늘은 유나가 나를 읽었다. 내가 그 서점 얘기를 할 때만 느려진다는 걸, 나는 몰랐다. 남의 마음은 문장으로 뽑아내면서, 정작 내 마음이 어디서 느려지는지는 나도 몰랐던 거다. 그걸 유나가 대신 짚어줬다.
나는 그때 유나를 마주 읽었다. 직업병이었다. 유나가 잔을 만지작거리는 손, 전화가 올 때마다 반사적으로 화면을 뒤집어 확인하는 버릇, "무감각하다"고 말하면서도 눈은 계속 창밖 회사 건물 쪽을 향하는 것. 나는 그걸 한 줄로 읽었다. 유나는 무감각한 게 아니라, 무감각한 척 버티는 중이었다. 무너지면 다시 못 일어날까 봐, 감각을 꺼둔 채 겨우 걷고 있었다. 그건 반년 전의 나였다. 나는 그걸 정확히 읽었는데, 입 밖으론 내지 않았다. 유나가 아직 들을 준비가 안 됐다는 것까지 읽었으니까. 남을 읽는 건 이렇게 쉬운데, 나는 왜 나만 못 읽었을까.
카페를 나오는데 유나가 내 등을 툭 쳤다. "야, 그 오 CD님 건 어떻게 할 거야? 그것도 이번 주말까지라며." 유나는 알고 있었다. 업계는 좁으니까. "나는 맨날 남 눈치 보고 정했거든. 회사 눈치, 위 눈치. 그러다 내가 뭘 원하는지도 까먹었어. 너는…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 유나는 그 말을 조언처럼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얘기처럼, 부러움처럼 흘렸다.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 유나가 무심코 던진 말이 오래 남았다. 나는 늘 남을 위해 문장을 정했다. 광고주를 위해, 소비자를 위해, 회사를 위해. 오세혁의 제안도 사실은 오세혁을 위한 거였고, 여기 남는 것도 어쩌면 문시원을 위한 걸지 몰랐다. 나를 위한 선택이 뭔지, 나는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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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나는 책상에 엎어둔 『돌아가는 길』을 봤다.
이 주째 첫 장도 못 편 책이었다. 제목이 무서워서. 그런데 오늘은 유나의 말 때문인지, 손이 갔다.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이 책도 문시원을 위해, 혹은 문시원의 눈치를 보며 못 폈던 건지도 몰랐다. 오늘은 그냥, 나를 위해 폈다.
첫 장을 넘겼다. 두 번째 장. 세 번째 장. 신기하게도, 한 번 넘어가니 계속 넘어갔다. 나는 그 밤을 꼬박 새워 그 책을 끝까지 읽었다. 첫 장만 읽고 덮던 내가, 이 주를 못 펴던 책을, 하룻밤에 다 읽었다.
『돌아가는 길』은 떠난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알았다. 이 책은 돌아가라는 책이 아니었다.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지금 어디에 서 있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돌아가는 길을 아는 것과, 지금 돌아가야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나는 도시로 돌아가는 길을 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오히려, 지금 당장 돌아갈 필요는 없는 거였다.
그 문장을 나 혼자 읽어낸 게, 이상하게 뿌듯했다. 처음이었다. 누가 처방해준 뜻을 받아 읽은 게 아니라, 내가 내 손으로 책을 펴고, 내 눈으로 뜻을 건져 올린 게. 나는 문시원 없이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가 처방을 쉬는 사이에, 나는 처방 없이 읽는 법을 배운 거였다.
책을 덮으며, 나는 방금 건진 그 뜻을 한 줄로 정리해봤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떠나도 된다는 뜻이다. 누가 책갈피에 적어준 문장이 아니었다. 내가 이 책 한 권을 밤새 읽고, 내 손으로 건져 올린 문장이었다. 카피라이터가 육 년간 남을 위해 뽑던 한 줄을, 처음으로 나를 위해 뽑은 거였다. 그 한 줄이 어떤 처방보다 정확했다. 내가 나한테 처방한 셈이니까.
그러자 이 책이 다시 보였다. 마음 빠진 처방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문시원은 물러서면서도, 나한테 필요한 딱 한 권을 골랐던 거다. 제목이 하필 『돌아가는 길』인 것도, 아무거나 집어 온 게 아니라 그가 나를 읽은 결과였을지 몰랐다. 그는 벽을 세우면서도, 그 벽 너머로 정확한 책 한 권을 밀어 넣어줬다. 마음이 없어 보였던 건, 마음을 감추느라 그랬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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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나는 서점 골목의 카페로 갔다. 류 사장에게 커피를 시키는데, 구인자 할머니가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학생, 오랜만이네." 할머니가 나를 알아봤다. "그 총각 서점, 여태 닫혀 있지?"
"…네." 나는 옆에 앉았다. "할머니,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시원 씨는 왜… 가끔 이렇게 사라져요?"
할머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의 어두운 서점을 봤다.
"그 총각이 저 서점을 노 선생한테 물려받았잖아." 할머니가 천천히 말했다. "노 선생이 저 서점 주인이었어. 책 한 권씩 골라주는 거, 그거 다 노 선생이 하던 거야. 시원이는 원래 잡지사 다니던 애였는데, 몸도 마음도 다 상해서 이 골목에 흘러들어 왔어. 그때 노 선생이 저 총각한테 책을 처방해줬지. 그러다 정이 들어서, 아예 눌러앉아 서점 일을 배웠어."
"노 선생님은…"
"삼 년 전에 가셨어." 할머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갑자기. 시원이가 그때 많이 무너졌어. 자기 살려준 사람인데, 못 지켰다고. 병이 깊어지는 것도 몰랐다고. 그때부터야, 저렇게 가끔 문 닫고 사라지는 거. 힘들면 숨어. 남 처방은 잘하면서, 자기 힘든 건 아무한테도 말을 안 해. 저 책상에 몇 해째 안 넘어가는 책 있는 거, 봤지? 그거 노 선생이 마지막으로 시원이한테 처방해준 책이래. 근데 그 총각이 그걸 아직도 못 넘겨. 넘기면 진짜 노 선생을 보내는 것 같아서 그런가 봐."
나는 그 말을 듣고 오래 말이 없었다. 못 지켰다는 죄책감. 살려준 사람을 잃은 상실. 그건 내 얘기였다. 나도 이한 선배를 못 지켰다고, 육 년을 그렇게 살았다. 문시원과 나는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 병. 정작 자기한테 필요한 책은 못 넘기는 병.
그제야 나는 오세혁의 시한에 왜 답을 못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문시원이 나처럼 살다 나처럼 무너질까 봐 무서웠던 거다. 이한 선배를 못 지킨 나는, 또 한 사람이 내 눈앞에서 서서히 꺼지는 걸 못 견뎠다. 도시로 돌아가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엔 늦지 않고 싶다는 것. 한 번 놓친 사람을 두 번 놓치지 않겠다는 것. 그게 내 발을 이 골목에 붙들고 있었다.
"할머니, 저 하나만 더 여쭤봐도 돼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옛날에, 이 서점 단골이던… 기자 하던 사람 얘기, 들으신 적 있으세요."
할머니가 나를 잠깐 봤다. "그 총각 얘기는 나도 잘 몰라. 노 선생이랑 시원이가 알던 손님이지. 왜, 학생이 아는 사람이야?"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 얘기를 여기서 꺼낼 순 없었다. 그건 문시원과 마주 앉아 할 얘기였다. 나는 그 이름을 마음에 눌러두었다.
"할머니." 나는 물었다. "제가 가서 문을 두드려도 될까요."
할머니는 나를 빤히 봤다. 그러더니 등을 떠밀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그건 내가 정할 일이 아니지." 할머니가 다시 차를 들었다. "학생 마음이 정할 일이지. 나는 저 서점이 다시 열리면 좋겠다는 것뿐이야. 저기 문 닫혀 있으면, 이 골목이 다 어두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 서점이 어두우면, 내 가을도 다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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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심했다.
오세혁에게 답하기 전에, 먼저 갈 곳이 있었다. 그 순서가 중요했다. 나는 늘 남이 정해준 순서대로, 급한 것부터 처리하며 살았다. 시한이 걸린 오세혁 답부터 하는 게 순서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 순서를 내가 뒤집었다. 시한보다 먼저, 내 마음이 급한 곳으로 갔다. 처음으로, 남의 데드라인이 아니라 내 마음의 우선순위대로 움직였다.
해가 기울 무렵 서점 골목에 닿았다. 멀리서부터 나는 걸음을 멈췄다.
서점에 불이 꺼져 있었다. 여전히. 그런데 유리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이 주 만에 처음으로 그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심장이 뛰었다. 돌아왔구나. 나는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안을 봤다.
어두운 서점 안에, 문시원이 있었다. 불도 안 켠 채로. 그는 서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책들을 큰 상자에 담고 있었다. 한 권, 한 권. 서가가 절반쯤 비어 있었다. 빈 책장이 어둠 속에서 이빨 빠진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건 돌아온 게 아니었다. 이건, 떠나려는 거였다. 그는 서점을 다시 여는 게 아니라, 정리하고 있었다. 책을 상자에 담아 어디론가 보내려는 것처럼. 이 느린 섬이, 정말로 가라앉으려 하고 있었다.
"시원 씨." 나는 나도 모르게 불렀다.
그의 손이 멈췄다. 어둠 속에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를 봤다. 그런데 그 얼굴이, 내가 알던 그 통찰의 눈이 아니었다. 지치고, 텅 빈, 처방할 힘을 다 잃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빈 책장을 등지고, 그가 나를 봤다.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못 했다.
제7화는 2026.09.26 저녁에 이어집니다.
제7화가 공개되면 이 기기로 바로 알림을 보내드려요. (계정 없이 이 기기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