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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도시 힐링 로맨스

가을 서점 — 제5화. 돌아가는 길

2026.09.19 발행 · 전 8
고층 유리 회의실의 다인과 오세혁

오세혁 CD를 만난 건, 그가 문자를 보낸 지 사흘 뒤였다.

약속 장소는 도심의 유리 건물이었다. 그가 옮긴다는 그 회사. 로비부터 빨랐다.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이 커피를 들고 통화하며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소리 없이 빠르게 올라갔다. 나는 그 속도가 낯설면서도, 몸 어딘가가 그 속도를 기억하고 반응하는 걸 느꼈다.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긴장인지 설렘인지, 나도 몰랐다. 그 반응이 배신처럼 느껴졌다. 은행잎 골목을 두고, 몸이 먼저 이 유리 건물에 반응하는 게. 사람은 머리로 정하기 전에 몸으로 먼저 기운다. 그리고 그날 내 몸은, 이 빠른 세계 쪽으로 반 뼘쯤 기울어 있었다.

"다인아, 얼굴 좋아졌다." 오세혁이 회의실에서 나를 맞았다. 유리벽 너머로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쉬니까 사람이 사네. 근데 이제 슬슬 심심하지?"

"…조금은요."

"거봐." 그가 웃었다. "내가 너 알아. 넌 쉬는 애가 아니야. 넌 만드는 애지. 여기 오면,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게 해줄게. 팀도 네가 원하는 대로 꾸리고. 연봉은 지금 말 안 해도 알지? 지금보다 훨씬 위야."

그는 조건을 하나씩 펼쳤다. 좋은 조건이었다. 나쁜 게 하나도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미워할 구석이 있으면 거절이 쉬운데, 이건 다 맞는 말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유리벽 너머 도시를 봤다. 저 아래 어딘가에, 은행잎 깔린 골목과 스탠드 불빛의 작은 서점이 있었다. 여기서는 그게 보이지 않았다. 너무 높아서, 너무 빨라서.

"넌 여기 어울려." 오세혁이 도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뷰 봐. 네가 만든 광고가 저 아래 수백만 명한테 뿌려지는 거야. 골방에서 혼자 책 읽는 거랑은 다르지. 넌 스케일이 있는 애야."

스케일이 있는 애. 나는 그 말이 칭찬인 걸 알면서도 어딘가 걸렸다. 광고는 수백만 명을 향하지만, 그 수백만 명은 다 얼굴이 없었다. 익명의 대중. 나는 육 년간 얼굴 없는 사람들을 향해 문장을 던졌고, 그러다 나도 얼굴을 잃었다. 반면 그 작은 서점은 딱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책 한 권을 정해주는 곳이었다. 스케일은 없었다. 대신 얼굴이 있었다. 나는 어느 쪽이 나를 살렸는지, 이 유리 회의실에선 자꾸 헷갈렸다.

"솔직히 말할게." 오세혁이 목소리를 낮췄다. "나 이번에 크게 걸었어. 팀 잘 꾸려야 해. 그래서 너 같은 검증된 애가 필요해. 근데 나도 위에 보고를 해야 하니까, 마냥 못 기다려. 이달 안에는 답을 줘. 다음 달 초에 팀 세팅 들어가야 하거든."

이달 안에. 그 시한이 회의실 유리에 쨍하게 박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답을 못 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오세혁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흔쾌한 게 더 부담이었다.

회의실을 나오는데 오세혁이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했다. "다인아." 그가 문이 닫히기 전에 말했다. "너 그 회사 나올 때, 쉬는 재능 없다는 말 들었다며. 근데 나는 그게 흠이라고 생각 안 해. 세상엔 뛰는 게 맞는 사람도 있어. 넌 그런 애야. 죄책감 갖지 마."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나는 거울 같은 벽에 비친 나를 봤다. 정장을 입은 나. 이 건물에 어울리는 나. 그 얼굴이 낯설지 않아서, 그게 무서웠다. 도시는 이렇게 사람을 부른다. 나쁜 말이 아니라, 제일 듣고 싶은 말로.

✦ ✦ ✦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계속 그 조건들을 곱씹었다.

여기 남는 게 도망이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낯선 동네에 숨어서, 책이나 받아 읽으며 가을을 흘려보내는 게, 어쩌면 그냥 현실 도피 아닐까. 오세혁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뛸 때 빛나는 애인데, 지금 나는 그냥 멈춰서 녹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쉬는 것과 도망치는 건 어떻게 구분하지. 나는 그 답을 몰랐다.

그런데 문득, 지난 몇 주가 도피만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었고, 처음으로 새벽이 무섭지 않았고, 처음으로 죽은 선배를 죄책감이 아니라 슬픔으로 떠올렸다. 도피였다면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도망친 자리에서 사람이 회복되기도 하나. 아니면 회복인 척 그냥 멈춰 있는 건가. 지하철이 흔들릴 때마다 저울이 이쪽저쪽으로 기울었다. 빠른 세계와 느린 골목. 나는 아직 어느 쪽에도 온전히 서지 못했다.

지하철이 회사 있던 동네를 지날 때, 창밖으로 그 유리 빌딩들이 스쳤다. 불이 켜진 창들. 저 안에서 누군가 지금도 뛰고 있었다. 예전의 나처럼. 그 불빛이 이상하게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저기 속했던 사람이었다. 저 속도가 내 것이었다. 그걸 버리고 은행잎 골목에 숨은 나는, 진짜 나일까 아니면 잠깐 도망친 나일까.

유나 생각이 났다. 유나는 지금도 저 불빛 중 하나에 있을 거였다.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자기는 못 멈추는 친구. 그리고 이한 선배 생각도 났다. 선배도 저 불빛 중 하나였다. 멈추라는 말을 못 듣고, 멈추는 법을 못 배우고, 결국 저 불빛 속에서 꺼진 사람. 나는 저 불빛으로 돌아가는 게 유나처럼 사는 건지, 선배처럼 끝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같은 불빛인데 누구에겐 삶이고 누구에겐 끝이었다. 나는 어느 쪽이 될지 몰라서, 그 불빛이 아름다우면서 무서웠다.

토요일이 됐다. 나는 서점으로 갔다. 답을 찾으러. 아니, 답을 미루러.

✦ ✦ ✦

문시원은 그 책상 앞에 있었다. 여전히 그 펼쳐진 책 앞에.

나는 이번엔 뭔가를 말하고 싶었다. 오세혁 얘기를, 시한 얘기를, 이한 선배 얘기를. 지난 몇 주간 이 서점에서 나는 자꾸 무언가를 흘렸고, 그때마다 이 사람은 나를 정확히 읽어줬으니까. 오늘도 그래주길 바랐다.

"저, 옛날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나는 말을 꺼냈다. "다시 오라고. 좋은 자리로."

문시원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러더니 그는 평소처럼 되묻지 않았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도, 마음이 어때요,도 없었다. 그냥 짧게 말했다.

"잘됐네요."

나는 그 대답에 조금 당황했다. 그답지 않았다. 늘 한 걸음 더 들어와 나를 읽어주던 사람이, 오늘은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그… 그게, 저는 잘 모르겠어서요. 여기 남는 게 도망 같기도 하고—"

"손님이 정하실 일이에요." 그가 말을 잘랐다. 차가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 문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저는 책만 정해드리는 사람이에요. 손님 인생까지 정해드릴 순 없어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맞는데, 이상하게 서운했다. 나는 그에게 인생을 정해달라는 게 아니었다. 그냥, 나를 읽어달라는 거였다. 지난 몇 주처럼. 그런데 오늘 그는 나를 읽기를 멈췄다. 왜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이한 선배 얘기를 꺼낼 것 같아서. 이 서점의 옛 단골, 그가 알던 사람, 그리고 그가 잃은 것과 이어진 이야기를. 그걸 건드리면 자기 상실까지 건드려야 하니까, 그는 서가 뒤로 물러선 거였다. 나는 남의 원고에서 물러선 문장을 알아본다. 이 사람은 지금, 자기 이야기 앞에서 물러서고 있었다.

"시원 씨." 나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구인자 할머니가 부르던 이름을. "저번에, 정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자기 책은 못 넘긴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제가—"

"손님." 그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저는 손님이 처방받으러 오는 서점 주인이에요. 그 이상은 아니에요."

그 이상은 아니에요. 나는 그 선긋기에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건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한테 하는 말 같았다. 정들지 말자고, 넘어오지 말자고, 자기한테 긋는 선. 나도 그 선을 안다. 나도 늘 그었으니까. 아플 것 같으면 미리 긋는 선. 이 사람도 나처럼, 아플 것 같아서 먼저 물러서는 사람이었다.

"오늘 책은요?" 나는 겨우 물었다.

그는 서가로 가서, 이번엔 오래 머물지 않고 한 권을 들고 왔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거요."

제목을 보고 나는 웃을 뻔했다. 돌아가는 길. 지금 내 상황에 이보다 정확한 제목이 있을까. 그런데 그가 이 책을 나를 읽고 고른 건지, 아니면 그냥 아무거나 집어 온 건지, 오늘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그의 처방이 처방 같지 않았다. 마음이 빠진 처방. 그건 그냥 책이었다.

나는 그 마음 빠진 처방이, 지난 몇 주 받은 어떤 책보다 아팠다. 사람은 정성이 빠진 걸 제일 먼저 안다. 그가 나에게 벽을 세운 거였다. 도시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손님한테 정을 더 주지 않으려고. 어차피 떠날 사람한테 마음 주면 자기가 아프니까. 나는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화도 못 냈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나도 늘 그렇게, 떠날 것 같은 사람한테는 미리 벽을 세우고 살았으니까.

나는 그 책을 받아 봉투에 넣고 나왔다. 골목의 은행잎이 발밑에서 부서졌다. 뒤를 돌아보니, 서점의 스탠드 불빛이 유리문 너머에서 조금 흐려 보였다. 아니면 내 마음이 흐려진 건지도 몰랐다.

✦ ✦ ✦

그 주 내내, 나는 『돌아가는 길』을 펴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처방받은 책을 끝까지 읽는 사람이 돼 있었는데, 이번 책은 첫 장도 못 폈다. 제목이 무서웠다. 이 책을 읽으면, 정말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 아니면 반대로, 돌아가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어느 쪽이든 나는 아직 들을 준비가 안 돼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책상에 엎어두었다. 첫 장만 읽고 덮던 옛날 버릇이, 이번엔 첫 장도 못 여는 걸로 돌아왔다.

주중에 나는 서점에 가지 못했다. 오세혁이 이런저런 자료를 보내왔고, 나는 그걸 검토했다. 계약서 초안, 팀 구성안, 프로젝트 리스트. 그걸 보고 있으면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여기 이 카피는 이렇게, 이 방향은 이렇게. 손이 근질거렸다. 오세혁 말이 맞았다. 나는 저 일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잘했다. 잘하는 걸 하는 건 편했다. 편한 쪽으로 사람은 자꾸 기운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새벽이었다. 서점에 다닐 땐 새벽까지 책을 읽었는데, 다시 새벽까지 남의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예전의 속도로 돌아가 있었다. 몸이 먼저 돌아갔다. 마음이 정하기도 전에.

무서웠다. 몸이 이렇게 쉽게 돌아간다는 게. 나는 겨우 몇 주 느려졌을 뿐인데, 자료 몇 장에 다시 예전 속도로 튕겨 돌아갔다. 사람은 배운 대로 산다더니, 나는 육 년을 그 속도로 배웠으니 몇 주로는 안 바뀌는 거였다.

그런데 자료를 검토하다 나는 한 카피 앞에서 멈췄다. '지금 시작하세요. 늦기 전에.' 예전 같으면 술술 고쳤을 문장인데, 그날은 그 문장이 이상하게 아팠다. 지금 시작하세요, 늦기 전에. 나는 그 문장을 육 년간 팔았다. 그리고 그 문장에 쫓겨, 이한 선배는 늦기 전에 무언가를 해내려다 쓰러졌다.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남을 재촉하는 문장을 나는 더는 못 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내 직업이었다. 재촉이 직업인 사람이, 재촉이 사람을 죽이는 걸 봤다. 그게 내가 그 세계로 못 돌아가는 진짜 이유인지도 몰랐다.

토요일이 왔다. 나는 이번 주엔 꼭 서점에 가려고 했다. 문시원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뭘 사과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런데 오세혁이 급하게 미팅을 잡았고, 나는 또 도시로 불려 갔다. 저녁 늦게야 겨우 골목으로 갔다.

가을 서점의 유리문은 어두웠다.

불이 꺼져 있었다. 스탠드도, 안쪽 책상의 불빛도. 이 시간에 불이 꺼진 걸 본 적이 없었다. 새벽 세 시에도 켜져 있던 불이었는데. 나는 유리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에 붙은 종이 한 장을 봤다.

불 꺼진 서점 유리문에 붙은 손글씨 쪽지

손글씨였다. 그의 글씨.

당분간 처방을 쉽니다.

나는 그 다섯 글자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당분간. 그게 며칠인지, 몇 달인지, 아니면 영영인지, 아무 설명이 없었다.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오세혁의 시한도, 도시의 속도도 아니라, 이 작은 서점이 사라질까 봐. 도시 한복판에 하나 있던 느린 섬이, 내가 잠깐 한눈판 사이에 문을 닫을까 봐.

당분간 처방을 쉽니다. 나는 그 문장을 카피라이터의 눈으로 읽었다. 그리고 알았다. 이건 서점을 쉰다는 말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정해줄 사람이 없어서, 이제 남을 정해주는 것마저 그만두려는 거였다. 처방을 쉰다는 건, 자기 이야기 앞에서 완전히 돌아섰다는 뜻이었다. 문장은 짧을수록 많은 걸 숨긴다. 나는 그 다섯 글자 뒤에 숨은 긴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나 좀 내버려 둬요, 라는. 그건 지난주에 내가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우리는 같은 말을, 각자의 문 뒤에서 하고 있었다.

나는 유리문에 손을 댔다. 차가웠다. 안에서 늘 새어 나오던 온기가 없었다. 문 하나 사이인데 안과 밖의 온도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나는 이 골목에서 배웠는데, 오늘은 안쪽까지 차가웠다. 내가 도시에 한눈파는 사이, 이 서점도 나처럼 불을 꺼버린 거였다.

나는 옆 카페로 갔다. 류 사장이 카운터에서 늦은 손님에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저 서점, 왜 문 닫았어요?" 나는 물었다.

"아, 그 총각." 류 사장이 잔을 닦으며 말했다. "며칠 됐어요. 통 안 보이대. 원래 좀 그래요, 그 친구. 가끔 며칠씩 문 닫고 잠수 타. 노 선생 돌아가시고 나서 생긴 버릇이래요. 힘들면 사라졌다가 또 슬그머니 나오고." 그가 나를 흘긋 봤다. "근데 이번엔 좀 길다. 학생이 자주 오던데, 무슨 일 있었나?"

무슨 일. 나는 대답을 못 했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다. 내가 도시로 반쯤 발을 걸친 것. 그가 그걸 눈치챈 것. 그리고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물러선 것.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한 줄로 설명하나. 카피라이터인 나도, 그건 한 줄로 못 줄였다.

어두운 유리문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 뒤로, 캄캄한 서가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 골목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시를 고를지 말지 정하기도 전에, 골목이 먼저 나를 떠날 것 같았다.

6화는 2026.09.20 저녁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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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은 창작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상호·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삽화는 AI로 생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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