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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도시 힐링 로맨스

가을 서점 — 제4화. 가을의 사람

2026.09.13 발행 · 전 8
창밖 도시 야경, 유리에 비친 다인

밑줄 옆에는, 작은 연필 글씨로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

언젠가 다인이한테.

나는 그 다섯 글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언젠가 다인이한테. 세상에 다인이라는 이름이 나 하나는 아니겠지. 밑줄 그은 사람이 아는 다인이 나일 리 없지. 나는 그렇게 우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 글씨가, 그 글씨체가, 우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육 년 전에 멈춘 그 글씨. 내 기획서마다 빨간 펜으로 코멘트를 달던, 밤새운 새벽에 포스트잇을 붙여주던, 그 사람의 글씨.

이한 선배였다.

이 책은 이한 선배가 읽던 책이었다. 이 서점에서. 그리고 어느 문장에 밑줄을 긋고, 그 옆에 적었다. 언젠가 다인이한테. 언젠가, 이 책을 나한테 주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그 언젠가는 오지 않았다. 선배는 육 년 전 회의실에서 쓰러졌고, 이 책은 주인을 잃고 서가에 꽂혀 있다가, 육 년 뒤 오늘, 문시원의 손을 거쳐 나에게 왔다.

나는 책을 가슴에 안고 한참 앉아 있었다. 선배가 나에게 주려던 책을, 육 년이 지나서야 받은 거였다. 세상에서 제일 늦게 도착한 선물. 부친 사람은 이미 없는데, 선물만 도착한.

나는 그 밑줄 그어진 문장을 읽었다. "남의 이야기를 오래 쓴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쓰는 법을 잊는다. 그러나 잊은 것이지 잃은 것은 아니다." 선배가 왜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선배도 그랬으니까. 남의 광고만 쓰다 자기 얘기는 한 줄도 못 쓰던 사람. 그리고 그 옆에 적었다. 언젠가 다인이한테. 나도 그랬으니까. 남 얘기만 쓰는 후배가 걱정됐던 거다. 선배는 자기가 못 벗어난 그 길에서, 나만은 벗어나기를 바랐던 거다. 이 문장을 언젠가 나한테 주면서.

그런데 선배는 그 언젠가에 나를 붙잡지 못했다. 자기가 먼저 그 길 끝에서 쓰러졌으니까. 남 걱정만 하다 자기를 못 챙긴 사람. 나는 그게 꼭 나 같아서, 그 밑줄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육 년 만에 처음으로 선배 때문에 울었다. 죄책감이 아니라, 그냥 슬픔으로. 죄책감은 나를 향한 감정이고, 슬픔은 그 사람을 향한 감정이다. 나는 육 년 동안 나를 벌하느라, 선배를 제대로 슬퍼한 적이 없었다.

✦ ✦ ✦

이한 선배는 내 첫 사수였다.

신입 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카피가 뭔지도 모르고 광고 회사에 들어왔다. 다들 나를 못 미더워할 때, 선배만 달랐다. 선배는 내가 쓴 형편없는 카피 백 개 중에서 딱 한 줄을 짚었다. "다인아, 이 한 줄. 이거 봐. 너 사람을 읽는 눈이 있어. 이건 못 가르치는 거야." 나는 그 말로 육 년을 버텼다. 힘들 때마다 그 한마디를 꺼내 봤다. 사람을 읽는 눈이 있다는 말. 그게 내 유일한 재능이라고, 나는 믿었다.

선배는 늘 야근했다. 얼굴이 반쪽이었다. 마감이 끝나면 또 마감이 왔고, 선배는 한 번도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책임감이 병이었다. 나는 그런 선배를 닮아갔다. 아니라고 말 못 하는 것도, 얼굴이 반쪽이 되는 것도.

선배는 나한테만 다르게 대한 게 아니었다. 팀 막내가 실수하면 대신 혼났고, 후배가 밤새우면 자기도 남아 같이 밤을 새웠다. 다들 선배를 좋아했다. 좋아하면서도 아무도 선배를 챙기지는 않았다. 챙김을 주는 사람은 챙김을 못 받는다. 다들 선배가 알아서 잘 버티는 줄 알았다. 늘 괜찮다고 하니까. 괜찮다는 말을 제일 믿으면 안 되는 사람한테서, 우리는 그 말을 제일 쉽게 믿었다.

나는 그 회사에서 선배한테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일 못 갚은 사람이기도 했다. 받을 땐 당연한 줄 알았다. 갚아야 하는 줄도 몰랐다. 선배가 가고 나서야,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알았다. 원래 그렇다. 사람은 있을 때 못 갚고, 없어지고 나서 계산서를 받는다.

그리고 그해 가을, 선배는 회의실에서 쓰러졌다.

큰 캠페인 마감이었다. 다들 며칠째 밤을 새우던 중이었다. 나는 그때 옆 팀 마감에 차출돼 있었다. 선배 얼굴을 마지막으로 제대로 본 게 언제였는지도 몰랐다. 복도에서 스쳐도 인사만 하고 각자 회의실로 뛰어갔다. 선배가 며칠째 컨디션이 안 좋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나는 내 마감이 급해서 흘려들었다. 괜찮으세요, 한 번만 물었어도.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한 번만 붙잡았어도. 그런데 나는 못 했다. 남의 물건을 파는 문장이, 사람 하나보다 급했으니까.

선배는 병원에서 이틀을 버티다 갔다. 서른네 살이었다. 나는 장례식장에서 울지 못했다. 눈물이 안 났다. 슬픔이 오기 전에 죄책감이 먼저 와서, 슬퍼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았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선배의 영정을 봤다. 사진 속 선배는 웃고 있었다. 회사 프로필 사진이었다. 정장을 입고, 억지로 웃는. 나는 그 사진이 슬펐다. 선배답지 않아서. 선배는 밤새우고 커피 마시며 "다인아 이건 좋다" 할 때가 제일 선배다웠는데, 영정 속 선배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장 차림으로 웃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제일 안 닮은 사진으로 남는다. 나는 그게 이상하게 억울했다.

선배한테는 가족도 별로 없었다. 조문객도 대부분 회사 사람이었다. 다들 검은 옷을 입고 와서 삼십 분쯤 앉아 있다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마감이 있으니까. 선배를 죽인 그 마감이, 선배 장례식에서도 사람들을 데려갔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나도 그날 회사로 돌아가 밤을 새웠다. 선배가 죽은 날에도, 나는 남의 물건을 파는 문장을 썼다. 그 뒤로 나는 이한 선배 생각을 오래 안 하기로 했다. 생각하면 아프고, 아프면 아무 일도 못 하니까. 나는 아픈 것도 효율이 나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선배가, 여기 있었다. 이 골목에.

텅 빈 밤의 사무실, 모니터의 포스트잇

✦ ✦ ✦

나는 그 밤을 못 넘겼다.

새벽 한 시, 나는 책을 들고 다시 골목으로 나갔다. 미친 짓인 걸 알았다. 이 시간에 서점이 열려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발이 먼저 움직였다. 확인해야 했다. 이 책이 정말 선배 거였는지, 선배가 정말 여기 왔었는지, 누구한테라도 물어야 잠이 올 것 같았다.

골목 끝, 가을 서점에 불이 켜져 있었다.

스탠드 불빛이었다. 문시원은 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그 펼쳐진 책 앞에. 이 사람은 잠도 안 자나. 나는 유리문을 밀었다. 종이 딸랑, 울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 새벽에 손님이 온 게, 이번에도 이상하지 않은 얼굴로.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나는 대답 대신 책을 카운터에 올려놨다. 『가을의 사람』. 밑줄 그어진 페이지를 폈다. 손이 떨렸다.

"이 책, 누구 거였어요?"

문시원이 그 페이지를 봤다. 밑줄과, 그 옆의 작은 글씨를. 그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그는 오래 그 글씨를 봤다. 그러더니 조용히 말했다.

"…이 서점 오래된 단골이었어요. 광고 하던 분. 밤마다 야근하고 와서, 노 선생한테 책 한 권씩 받아 갔어요."

"그분… 지금은요?"

문시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대답이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침묵으로 다시 확인했다.

"몇 해 전에요." 그가 낮게 말했다. "갑자기. 마감 중에 쓰러졌다고… 들었어요. 노 선생이 많이 아파했어요. 아끼던 사람이라. 저도 몇 번 봤어요. 조용하고, 사람 좋고. 늘 피곤해 보이던 분."

늘 피곤해 보이던 분. 나는 그 말에 목이 메었다. 조용하고 사람 좋고 늘 피곤해 보이던 사람. 그게 이한 선배였다. 문시원은 선배를 알았다. 이 서점의 단골로. 그런데 그는, 그 단골이 나와 무슨 사이인지는 몰랐다. 나는 그걸 말하지 않았다. 이 책이 나에게 주려던 거였다는 것도, 그 사람이 내 사수였다는 것도, 내가 그를 못 지켰다는 것도. 여긴 이유를 묻지 않는 곳이니까. 그리고 나는, 아직 그걸 소리 내 말할 준비가 안 돼 있었다.

문시원은 더 캐묻지 않았다. 왜 이 새벽에 이 책을 들고 뛰어왔는지, 왜 손이 떨리는지, 왜 눈이 붉은지. 여긴 이유를 묻지 않는 곳이니까. 나는 그 침묵이 처음으로 답답하지 않고 고마웠다. 묻지 않는다는 건, 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준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가 딱 하나, 조용히 말했다. "그분이 받아 간 책들, 아직 여기 몇 권 있어요. 다 헌책으로 돌아왔거든요. 읽고 두고 가는 분이었어요." 그가 서가 한쪽을 봤다. "가끔 저는, 그 책들이 그분 대신 여기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은 갔는데 책은 남아서. 손님이 오늘 받은 것도 그중 하나예요."

사람은 갔는데 책은 남아서. 나는 그 서가를 봤다. 저 어딘가에 선배가 만졌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선배의 지문이 남은 책들이. 위로에도 지문이 남는다던 말이, 이렇게 돌아왔다. 이 서점은 선배가 마지막으로 위로받던 곳이었다. 도시가 선배를 갈아 없앤 그 시절에, 선배는 밤마다 여기 와서 책 한 권씩 받아 갔다. 나는 그것도 몰랐다. 선배가 어디서 위로받는지도 모르고, 나는 내 마감만 봤다.

"이 책, 제가 가져도 돼요?" 나는 물었다.

"원래 손님 거예요." 문시원이 말했다. "처방받은 책이잖아요."

원래 손님 거예요. 나는 그 말이 두 가지로 들렸다. 처방받았으니 내 거라는 뜻과, 처음부터 나에게 오게 돼 있던 책이라는 뜻. 어쩌면 둘 다였다. 선배가 언젠가 나한테, 하고 적어둔 책이 육 년을 돌아 나에게 온 거니까. 세상에서 제일 늦은 우편이, 이 서점을 우체국 삼아 도착한 거니까.

나는 그 책을 안고 나왔다. 새벽 골목이 찼다. 나는 처음으로, 이 동네를 내가 왜 골랐는지 알 것 같았다. 언젠가 누가, 지치면 이런 골목에 가서 책이나 한 권 받아 오라고 했었다. 그게 선배였다. 이한 선배가, 언젠가 나에게 이 골목을 말했었다. 나는 그걸 잊고 있다가, 지쳐서 도망칠 곳을 찾다가, 그 말이 무의식에 남아 여기로 온 거였다. 우연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이 남긴 길이었다.

✦ ✦ ✦

원룸으로 돌아와, 나는 오랜만에 이한 선배 생각을 오래 했다.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아니, 아팠는데, 견딜 만하게 아팠다. 육 년 동안 나는 선배 생각을 통째로 봉인했다. 봉인하면 안 아플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 봉인이 나를 더 갉아먹고 있었다. 아픈 걸 안 아픈 척하는 게, 아픈 것보다 더 사람을 소진시킨다. 나는 그걸 육 년 만에, 이 헌책 한 권 앞에서 알았다.

번아웃이 뭔지 나는 이제 알 것 같았다. 그건 일이 많아서 오는 게 아니었다. 감정을 계속 미뤄서 오는 거였다. 슬퍼할 걸 안 슬퍼하고, 아파할 걸 안 아파하고, 쉴 걸 안 쉬고. 미룬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 쌓였다가 어느 날 이자까지 붙어 한꺼번에 청구된다. 나는 육 년 치 감정을 미뤄둔 사람이었다. 그 청구서가 지금 온 거였다. 회사를 그만둔 게 아니라, 미뤄둔 감정이 나를 그만두게 한 거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선배한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잘 지내라는 말. 늦었지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이 새벽에. 나는 화면을 봤다. 오세혁 CD였다. 예전 회사의 상사. 나를 아끼던 사람. 나는 잠깐 망설이다 문자를 열었다.

다인아. 나 이번에 큰 데로 옮긴다. 팀을 새로 꾸리는데, 네 자리가 하나 있어. 너 같은 애가 필요해. 쉬는 것도 좋지만, 넌 원래 뛸 때 빛나는 애잖아. 이달 안에 답 줘. 팀 세팅해야 해서.

나는 그 문자를 오래 봤다. 이달 안에. 도시가, 시한을 걸고 나를 다시 부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죽은 선배가 남긴 헌책이, 다른 손에는 살아 있는 도시가 내민 자리가 있었다. 느린 책과 빠른 자리. 나는 어느 쪽도 아직 놓지 못한 채로, 새벽 창밖의 도시 불빛을 봤다. 저 불빛 어딘가에, 여전히 누군가 밤을 새우고 있을 거였다. 예전의 나처럼. 그리고 어쩌면, 예전의 선배처럼.

나도 모르게 유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새벽에. 유나는 두 번 만에 받았다. 아직 안 자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잠 못 드는 밤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오세혁 CD가 스카웃 문자 보냈어." 내가 말했다.

"대박. 야, 그거 완전 좋은 자리야. 지금 업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데야." 유나의 목소리가 대번에 빨라졌다. "너 그거 잡아. 무조건. 쉴 만큼 쉬었잖아. 이제 슬슬 근질거리지?"

"…모르겠어."

"모르긴 뭘 몰라, 정다인. 너 원래 그런 데서 빛나던 애야. 오세혁 CD가 아무나 데려가냐? 너니까 부르는 거지." 유나가 잠깐 숨을 골랐다. "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뭐 있어?"

나는 대답을 못 했다. 손에 든 선배의 책 때문이라고, 육 년 전에 못 지킨 사람 때문이라고, 그 빠른 세계로 돌아가면 나는 또 누군가를 못 지킬까 봐 무섭다고 — 그런 말은 새벽 세 시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졸려서 그래" 하고 전화를 끊었다. 유나에게도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선배의 책과 오세혁의 문자를 나란히 놨다. 헌책 한 권과 휴대폰 화면 하나. 과거와 미래. 죽은 사람이 남긴 것과 산 사람이 내민 것. 어느 쪽을 골라도 다른 쪽을 배신하는 기분이었다. 도시로 돌아가면 선배를 두 번 죽이는 것 같고, 여기 남으면 나를 부르는 손을 뿌리치는 것 같고. 이달 안에. 그 시한이 자꾸 나를 재촉했다. 도시는 답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답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진짜 질문을 할 수 있다던, 그 책의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아직 진짜 질문에 도달하지도 못했는데, 도시는 벌써 답을 내놓으라 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도시가 반짝였다. 아름다운데 무서웠다. 저 반짝임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야근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았다. 나는 그 반짝임으로 돌아갈지, 이 골목의 느린 어둠에 남을지, 그날 밤 끝내 정하지 못했다.

새벽 창가, 휴대폰 화면의 문자
5화는 2026.09.19 저녁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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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은 창작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상호·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삽화는 AI로 생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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