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서점 — 제3화. 읽는 속도

수요일에 나는 오랜만에 도시로 나갔다.
은행 일 때문이었다. 퇴직금 정산이니 뭐니, 처리할 게 남아 있었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회사가 있던 동네 근처로 갔다. 오랜만에 밟는 도심이었다. 그런데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나는 그 속도가 낯설었다.
사람들이 빨랐다. 다들 어딘가로 늦은 사람처럼 걸었다. 지하철 계단에서 누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며 짧게 혀를 찼다.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사람들이 횡단보도로 밀려나갔다. 커피를 든 채 통화하며 이메일을 확인하는 사람들. 한 달 전만 해도 나도 저 무리 중 하나였다.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쪽. 혀를 차는 쪽.
이상한 건 익명성이었다. 그 많은 사람 중 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수천 명이 스치는데, 내가 누구인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예전엔 그게 편했다. 도시의 익명성은 자유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조금 무서웠다. 여기서 내가 쓰러져도, 사람들은 나를 비껴갈 뿐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익명이라는 건, 사라져도 티가 안 난다는 뜻이었다.
예전에 나는 이 익명성으로 밥을 벌었다. 광고는 익명의 수천 명을 향해 한 줄을 던지는 일이다. 얼굴 없는 대중. 나는 그 얼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 물건을 팔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그 얼굴 없는 대중 중 하나가 됐다. 남을 익명으로 다루던 사람이 자기도 익명이 됐다. 그건 인과응보 같기도 했고 그냥 도시의 생리 같기도 했다. 도시는 모두를 얼굴 없게 만든다. 빨라야 하니까. 얼굴을 일일이 보면 빠를 수가 없으니까.
그 무리에서 빠져나온 지 한 달. 나는 벌써 그 속도를 못 따라갈 것 같았다. 한 달 만에 나는 느려졌다. 느려진 게 다행인지 큰일인지 그날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다시 저 무리로 돌아가면 나는 또 얼굴 없는 사람이 될 거라는 거였다. 그게 예전엔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금 무서웠다.
은행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옛 회사 건물이 저 앞에 보였다. 유리로 된 고층 빌딩. 저 어딘가 층에서 지금도 누군가 야근을 하고 있을 거였다. 유나도. 나는 그 빌딩을 오래 보지 않고 지하철로 돌아섰다.
지하철에서 유나에게 메시지가 왔다. — 야 너 오늘 시내 나왔었어? 회사 근처에서 너 닮은 사람 봤는데. / — 은행 일 있어서. / — 겸사겸사 들르지 그랬어. 다들 너 궁금해해. / 나는 답장을 안 했다. 궁금해하는 게 나인지, 내가 그만둔 그 자리인지 알 수 없어서. 도시는 사람이 아니라 자리를 궁금해한다. 자리에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자리에서 내려오니 보였다.
돌아가는 길, 나는 빨리 그 골목으로 가고 싶었다. 종이 딸랑 울리면 누군가 "오셨네요" 하는 그곳으로.
✦ ✦ ✦
토요일 저녁, 세 번째 방문이었다.
이제 나는 그 골목을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다. 은행나무는 잎을 더 떨궜고, 바닥의 노란 잎이 두꺼워졌다.
세 번 왔을 뿐인데 이 골목은 벌써 내 것 같았다. 도시에서 육 년을 산 동네보다, 세 번 온 이 골목이 더 익숙했다. 익숙함은 시간이 아니라 속도의 문제인 것 같았다. 빠른 데서는 십 년을 살아도 스치기만 하고, 느린 데서는 세 번만 와도 스민다. 나는 스미는 게 오랜만이었다. 어디에도 안 스미고 스치기만 하며 육 년을 살았으니까. 가을 서점의 유리문을 밀자, 이번엔 종소리보다 먼저 목소리가 났다.
"어이구, 새 단골 오셨네."
카운터 앞 낡은 의자에, 처음 보는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예순 후반쯤, 단정한 파마머리에 카디건 차림. 손에는 김이 나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문시원은 그 옆에서 다른 찻잔을 내려놓는 중이었다.
"단골은요. 세 번째예요." 내가 말했다.
"세 번이면 단골이지. 이 동네선." 할머니가 웃었다. "이 총각 서점에 세 번 오는 사람이 요새 몇이나 되는 줄 알아? 나 말고 자네가 처음이여."
구인자 할머니라고 했다. 이 골목에서 사십 년을 살았고, 매일 이 서점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신다고. 문시원이 차를 내주고, 할머니가 골목 얘기를 하고. 그게 두 사람의 오래된 리듬 같았다.
"자네 무슨 일 하는 사람이여?" 할머니가 물었다.
"할머니." 문시원이 낮게 말렸다. "여긴 안 묻는 데예요."
"나는 서점 주인 아니잖어. 나는 물어도 되지." 할머니가 능청스럽게 나를 봤다. 나는 그 참견이 밉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누가 나를 궁금해한다는 게, 도심에서 익명으로 스쳐온 하루 끝에 이상하게 고마웠다.
도시에선 아무도 안 물었다. 무슨 일 하냐고 물어도, 그건 명함을 확인하는 거였지 나를 궁금해하는 게 아니었다. 회사와 직급을 물었지 사람을 물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그냥 나를 물었다. 자네 무슨 일 하는 사람이여. 대답이 명함이든 백수든 상관없다는 투로. 나는 그 무심한 관심이 좋았다. 관심은 원래 이렇게 무심한 거였는데, 도시에서 나는 관심마저 계산으로만 받아왔다.
"카피라이터였어요. 광고 만드는." 내가 말했다. "지금은 그만뒀고요."
"광고. 그 텔레비전에 나오는 글귀 같은 거?"
"네, 그런 거요."
"어렵겄네. 남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짧게 후벼."
남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짧게 후벼. 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나는 남의 마음을 짧게 후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 말 끝에 내가 흘리듯 말했다.
"남 마음은 잘 후비는데… 정작 제 마음은 한 줄도 못 써요. 카피는 수천 개 썼는데, 나를 위한 문장은 하나도 없어요."
말해놓고 후회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아무한테도 안 하는 얘기가 이런 데서, 차 냄새와 종이 냄새 사이에서 툭 나와버린다. 나는 얼른 덧붙이려 했다. 그냥 하는 말이에요, 하고. 그런데 문시원이 먼저 말했다.
"지난주에 그러셨죠. 소용없을 것 같다고. 근데 그 말도 결국, 손님이 손님 마음을 쓴 거예요. 짧게. 정확히." 그가 나를 봤다.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쓰기로 한 거 아닐까요. 자기 마음은 팔 데가 없으니까."
나는 그 말에 잠깐 멍했다. 자기 마음은 팔 데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안 썼던 거다. 팔리지 않는 문장은 쓸 이유가 없다고 배웠으니까. 내 마음은 아무도 안 사니까, 나는 내 마음을 쓰는 법을 통째로 잊었다. 이 사람은 내가 지난주에 흘린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로 나를 다시 읽어줬다. 나는 남의 원고를 기억하는 사람인데,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손님은 자기가 못 쓰는 사람인 줄 아는데." 문시원이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엔 안 쓰는 걸 참는 사람이에요. 그 둘은 완전히 달라요. 못 쓰는 사람은 편한데, 안 쓰는 걸 참는 사람은 아파요. 손님, 자꾸 여기 와서 툭툭 흘리시잖아요. 그거 다 쓰고 싶은 문장들이에요. 흘리는 게 아니라 새는 거예요. 못 참아서."
새는 거예요, 못 참아서. 나는 그 말에 눈이 뜨거워졌다. 나는 흘리는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은 그걸 '새는 것'이라고 했다. 안에 있는 게 많아서 새는 거라고. 텅 빈 줄 알았던 내 안에, 사실은 새어 나올 만큼 무언가가 차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구인자 할머니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더니, 픽 웃고 차를 마셨다. 무슨 말을 하려다 참는 얼굴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할머니는 참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이 골목의 오랜 이야기를 다 알면서, 딱 필요한 만큼만 흘리는. 그날 할머니가 참은 말이 뭐였는지는, 나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된다.
✦ ✦ ✦
"이 서점, 원래 이 총각 게 아니여." 구인자 할머니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할머니." 문시원이 또 말렸지만, 이번엔 힘이 없었다.
"왜. 이건 손님 사정도 아니고 서점 사정인디. 서점 얘기는 해도 되잖어." 할머니가 나를 봤다. "원래 노 선생이라고, 이 서점 처음 연 양반이 있었어. 이십 몇 년 전에. 책을 골라주는 것도 그 양반이 시작한 거여. 사람 얼굴 보고 딱 한 권 정해주는 거. 그 양반이 그렇게 용했어. 이 총각은 그 밑에서 배웠고."
나는 문시원을 봤다. 그는 찻잔을 정리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 선생이라는 이름에 잠깐 손이 멈춘 것 같았다.
"노 선생 돌아가시고, 이 총각이 물려받았지. 서점도, 그 책 골라주는 것도." 할머니가 말했다. "근데 이 총각은 노 선생만큼 자기는 못 골라. 남은 잘 골라주면서."
"노 선생은 왜 그렇게 책을 잘 골랐대요?" 내가 물었다.
"사람을 봤으니께." 할머니가 말했다. "책이 아니라 사람을 봤어. 이 사람이 지금 뭐가 고픈지, 뭐가 무서운지. 그걸 알면 책은 저절로 골라진다고 하더라고. 근데 그게 어디 쉬워. 자기 것도 못 보는 사람이 태반인디 남의 걸 보려면." 할머니가 문시원을 흘긋 봤다. "이 총각은 남 건 잘 봐. 자기 것만 못 보지. 노 선생이 늘 그랬어. 시원이 너는 남 처방은 백 점인데 자기 처방은 빵점이라고."
나는 그 말이 아팠다. 자기는 못 골라. 책상 위 그 펼쳐진 책이 떠올랐다. 몇 년째 같은 페이지. 정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라던 그의 말.
"옛날엔 단골도 많았는디." 할머니가 창밖 어두워진 골목을 봤다. "그중에 광고 하던 총각도 있었어. 밤마다 야근하고 와서, 노 선생한테 책 한 권씩 받아 가더라고. 얼굴이 늘 반쪽이었어. 무슨 마감이 그렇게 많은지."
광고 하던 총각. 밤마다 야근. 나는 찻잔을 든 손이 잠깐 멈췄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밤마다 야근하고, 얼굴이 늘 반쪽이던. 나에게 처음으로 사람을 읽는 눈이 있다고 말해준. 이한 선배. 나는 그 이름을 속으로 삼켰다. 설마. 세상에 밤마다 야근하는 광고쟁이가 어디 한둘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접었다. 접는 게 편했으니까.
이한 선배는 육 년 전에 죽었다. 큰 캠페인 마감 중에, 회의실에서 쓰러졌다. 밤을 며칠째 새우던 중이었다. 나는 그때 옆 팀 마감에 치여 선배가 쓰러지기 전 일주일을 제대로 못 봤다. 괜찮냐고 한 번만 물었어도.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한 번만 붙잡았어도. 그런데 나는 내 마감이 급했다. 남의 물건을 파는 문장이, 사람 하나보다 급했다. 그게 육 년째 나를 갉아먹는 죄책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한 선배 생각을 오래 안 하기로 했다. 생각하면 아프고, 아프면 또 아무 일도 못 하니까. 나는 아픈 것도 효율이 나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 총각은 요새 안 와요?" 나도 모르게 물었다.
할머니가 잠깐 나를 봤다. 그리고 대답 대신 차를 마셨다. 문시원도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말하지 않기로 한 무언가가 흘렀다. 나는 더 묻지 못했다. 여긴 이유를 묻지 않는 데니까.
✦ ✦ ✦
그날의 처방은 『가을의 사람』이었다.
문시원이 서가 깊은 데서 그 책을 들고 나왔을 때, 나는 그가 조금 오래 서가에 머물렀다고 느꼈다. 아무 책이나 집어 온 게 아니라, 뭔가를 한참 고르다 온 손 같았다.
"이번 책은요?" 내가 물었다. 이유를 묻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손님이 아까, 자기 마음은 한 줄도 못 쓴다고 하셨잖아요." 그가 책을 봉투에 넣으며 말했다. "이 책 쓴 사람도, 오래 그랬대요. 남 얘기만 쓰다가. 그러다 어느 가을에, 처음으로 자기 얘기를 썼대요. 그게 이 책이에요."
나는 그 책을 받아 들었다. 얇고, 표지가 낡았다. 오래 누군가의 손을 탄 헌책 같았다. 새 책이 아니라, 이미 누가 읽은 책.
"헌책이네요."
"여긴 헌책이 많아요." 문시원이 말했다. "누가 읽고 두고 간 책들. 저는 그게 더 좋아요. 새 책은 아무도 안 읽은 거지만, 헌책은 누군가 이미 위로받은 거니까. 위로에도 지문 같은 게 남거든요."
위로에도 지문이 남는다.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그렇다면 이 서점의 헌책들은 전부 누군가의 지문투성이일 거였다. 이 골목을 거쳐 간, 밤마다 잠 못 들던 사람들의 지문. 나도 언젠가 어느 책에 지문을 남기고 갈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낡은 책이 갑자기 따뜻했다. 나는 그 말을 종이봉투와 함께 안고 나왔다. 골목의 은행잎을 밟으며, 나는 오늘 흘린 말들을 생각했다. 카피는 수천 개 썼는데 내 문장은 없다는 말. 그런 말을 처음으로 소리 내 한 밤이었다.
✦ ✦ ✦
원룸으로 돌아와, 나는 『가을의 사람』을 폈다.
이제 나는 첫 장만 읽고 덮지 않았다. 지난 책을 끝까지 읽은 뒤로, 뭔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나는 소파에 다리를 접고 앉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정말로 남 얘기만 쓰던 사람의 이야기였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이상하게 나 같았다.
그런데 삼십 페이지쯤 넘겼을 때, 나는 멈췄다.
한 문장에 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헌책이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누가 읽고 밑줄을 그었겠지. 위로에도 지문이 남는다니까.

나는 그렇게 넘기려다, 그 밑줄을 다시 봤다. 밑줄 옆에, 아주 작게 연필로 뭔가 적혀 있었다. 흐릿한 글씨. 나는 그걸 읽으려고 스탠드 쪽으로 책을 기울였다.
그 글씨체를, 나는 알았다.
육 년 전, 내 첫 기획서마다 빨간 펜으로 코멘트를 달아주던 글씨.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늘 급하게 적던 글씨. 밤새운 새벽에 "다인아 이건 좋다"라고 포스트잇에 적어 모니터에 붙여주던 글씨.
그 글씨가, 육 년 전에 멈췄어야 할 그 글씨가, 지금 내 손안의 헌책 위에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비슷한 글씨겠지. 세상에 연필로 밑줄 긋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그런데 손이 떨리는 건 멈추지 않았다. 밑줄 옆에 적힌 그 작은 글씨를, 나는 아직 다 읽지 않았다. 읽으면 아닐 수 없게 될까 봐, 나는 스탠드 쪽으로 책을 기울이다 말았다.
읽어야 했다. 그런데 무서웠다.
나는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