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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도시 힐링 로맨스

가을 서점 — 제2화. 한 번에 한 권

2026.09.06 발행 · 전 8
스탠드 아래 펼쳐진 책과 손글씨 책갈피

일주일 동안, 나는 그 책을 다 읽지 못했다.

『멈춰도 되는 사람』. 얇은 책이었다. 앉은자리에서 두 시간이면 끝날 분량. 그런데 나는 첫 장을 다섯 번 읽고 다섯 번 덮었다. 읽으려고 앉으면 손이 자꾸 휴대폰으로 갔다. 뭘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안 찾는데, 나는 자꾸 찾을 게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몸이 아직 회사에 있었다. 마음만 퇴사한 몸은, 쉬는 법을 손끝까지 잊는 데 시간이 걸린다.

책은 이상한 말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용기다. 우리는 채우는 데는 익숙하지만 비우는 데는 서툴다." 나는 그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었는데, 밑줄 그을 색연필을 찾다가 그게 또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고 그만뒀다. 멈춰도 되는 사람을 읽으면서도 나는 뭔가를 하려고 했다. 병이 깊었다.

회사를 그만두면 시간이 남을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은 남는 게 아니라 무서운 거였다. 채워야 할 여덟 시간, 열 시간이 텅 빈 채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자꾸 뭘 만들어냈다. 원룸 청소를 두 번 하고, 안 볼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갈 데 없는 약속을 잡으려다 취소했다. 쉬는 게 목적이었는데, 나는 쉬지 않기 위해 온갖 걸 발명하고 있었다. 사람은 평생 배운 대로만 산다. 나는 달리는 것만 배웠어서, 멈추는 자리에서도 제자리걸음을 했다.

책갈피는 책상에 세워뒀다. 당신은 지금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열두 글자. 나는 그걸 하루에도 몇 번씩 봤다. 그 문장이 나를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손글씨는 반듯한데 마지막 획이 조금 흐려져 있었다. 쓰다가 잠깐 멈칫한 사람의 글씨. 남의 마음은 척척 처방하면서 자기 획 하나는 흐려지는 사람.

토요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나를 발견하고, 나는 조금 당황했다.

✦ ✦ ✦

토요일 저녁, 나는 다시 그 골목으로 갔다.

해가 일찍 졌다. 구월인데 벌써 저녁 공기가 서늘했다. 골목 초입 은행나무가 잎을 떨구기 시작했고, 가로등 아래 노란 잎이 몇 장 깔려 있었다. 도시의 큰길은 여전히 빨랐다. 퇴근길 사람들, 지하철 입구로 빨려 들어가는 무리, 배달 오토바이의 경적. 그런데 골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 그 모든 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세상에 이런 문턱이 있다. 넘으면 속도가 바뀌는 문턱.

나는 그 문턱이 좋았다. 큰길에선 아무도 나를 몰랐다. 수천 명이 스쳐 지나가는데 그중 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도시의 익명성. 편할 줄 알았는데 어느 날부터 그게 사람을 갉아먹었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건,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이 골목은 달랐다. 종이 딸랑 울리면 누군가 "오셨네요" 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있는 곳. 이름도 모르면서 얼굴은 아는 사이. 도시 한복판에 그런 데가 하나쯤 있다는 게, 생각보다 사람을 살렸다.

가을 서점의 유리문을 밀자 종이 딸랑, 울렸다. 종이 냄새와 스탠드 불빛. 남자는 지난번 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그 펼쳐진 책 앞에. 한 장도 안 넘어간 것 같았다.

"오셨네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놀라지 않았다.

"저, 지난번 책값…" 나는 지갑을 꺼냈다.

"다 읽으셨어요?"

나는 멈칫했다. 거짓말을 하려다, 이 사람 앞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뒀다.

"…아뇨. 못 읽었어요. 첫 장만 다섯 번."

남자는 웃지 않았다. 실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다는 듯이.

"그럼 값은 안 주셔도 돼요."

"네? 왜요. 받아 갔는데."

"안 읽었으면 안 받은 거예요, 여긴." 그가 말했다. "책은 페이지가 아니라, 읽힌 만큼만 값이 있어요. 첫 장만 읽으셨으면, 첫 장 값만 마음에 담아 가시면 돼요."

나는 그 말이 이상했다. 도시에서는 받으면 값을 치러야 했다. 쓰든 안 쓰든. 계약은 계약이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안 읽었으면 안 받은 거라고 했다. 나는 지갑을 도로 넣지 못하고 한참 서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걸 느꼈다. 이 서점은 세상의 계산법과 반대로 돌아갔다. 도시에서는 받은 만큼 갚고, 쓴 만큼 냈다. 안 쓴 것도 계약했으면 냈다. 나는 안 간 헬스장에 삼 년을 냈다. 그런데 여기선 안 읽은 책은 안 받은 거라고 했다. 마음에 담긴 만큼만 값이 있다고. 나는 그 계산법이 낯설어서, 오히려 그게 진짜 같았다. 세상이 다 거꾸로 서 있고, 이 작은 서점만 똑바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왜 못 읽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내가 물었다.

"여긴 안 물어요, 그건." 그가 말했다. "근데 손님이 궁금하시면, 손님이 말해도 돼요."

이상한 규칙이었다. 묻지는 않지만, 말하는 건 괜찮은. 나는 그 틈이 이상하게 편했다. 강요당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세상에 거의 없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읽으려고 앉으면, 자꾸 딴 걸 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말했다. "가만히 있는 게 잘 안 돼요.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게, 무슨 사치 같아요. 그 시간에 뭔가 해야 할 것 같고."

"뭘 해야 하는데요?"

"모르겠어요. 그냥, 뭐라도."

남자는 잠깐 나를 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손에 많이 쥐면 아무것도 못 읽는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근데 사실 반대도 맞아요. 아무것도 못 읽는 사람은, 사실 손에 아무것도 없는데 쥔 척하는 거예요. 놓으면 사라질까 봐."

나는 그 말에 숨이 잠깐 막혔다. 놓으면 사라질까 봐. 그게 정확히 나였다. 쓸모를 놓으면 내가 사라질까 봐, 나는 아무것도 없는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도 그랬다. 나는 직업병으로 사람을 카피 한 줄로 읽는다. 그를 한 줄로 줄이면 이랬다. '남을 정해주며 자기는 못 정하는 사람.' 손님이 뭘 읽어야 할지는 삼 초 만에 정하면서, 자기 책상의 책 한 권은 몇 년째 못 정하고 있었다. 남의 길은 훤히 보고 자기 길은 안 보이는 것. 그건 내가 제일 잘 아는 증상이었다. 나도 남의 마음은 한 줄로 파는데 내 마음은 한 줄도 못 쓰니까. 우리는 정말 같은 병을 반대쪽에서 앓고 있었다. 나는 그 진단을 속으로만 내렸다. 이 서점엔 이유를 묻지 않는 규칙이 있으니까, 진단도 속으로만.

✦ ✦ ✦

남자는 서가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딱 한 권을 들고 왔다.

"이건 왜 한 권만 줘요?" 나는 지난번부터 궁금하던 걸 물었다. "그냥 두세 권 추천해주면, 그중에 골라 읽으면 되잖아요."

"고르는 것도 일이니까요." 그가 책을 건네며 말했다. "손님은 지금 고르는 걸 하나라도 덜어야 하는 사람이에요. 뭘 읽을지까지 고르게 하면, 그게 또 숙제가 돼요. 그냥 한 권. 이거 읽으세요, 하고 정해주면, 손님은 읽기만 하면 돼요. 정하는 건 제가 할게요."

정하는 건 제가 할게요. 나는 그 말에 이상하게 목이 뜨거워졌다. 육 년 동안 나는 늘 정하는 사람이었다. 카피를 정하고, 방향을 정하고, 남의 마음을 정해서 팔았다. 아무도 나 대신 정해준 적이 없었다. 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마음이 놓이는 일인 줄 몰랐다.

책 제목은 『느린 편지』였다.

"이번엔 첫 장만 읽어도 돼요." 남자가 봉투에 책을 넣으며 말했다. "다 읽어야 한다는 것도, 손님한텐 또 하나의 숙제잖아요. 읽고 싶은 만큼만 읽으세요. 한 줄만 읽어도, 그 한 줄은 읽은 거예요."

나는 책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나가려다, 이번에도 그 책상 위 책을 봤다. 여전히 같은 페이지였다. 나는 이번엔 참지 못하고, 규칙을 어기고 물을 뻔했다. 그건 왜 안 읽으세요, 하고. 그런데 남자가 먼저, 내 시선을 눈치채고 말했다.

"저 책은, 제가 정해주는 사람이 없어서요."

그건 대답이 아니라 고백 같았다. 정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남에게는 한 권씩 정해주는 사람이, 정작 자기한테는 정해줄 사람이 없어서 한 장을 못 넘기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봉투 속 책과 함께 안고 나왔다. 골목의 은행잎이 한 장 더 떨어졌다.

✦ ✦ ✦

원룸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살아 있냐. 사흘 넘었는데 안 미쳤어?" 유나의 목소리 뒤로 사무실 소음이 들렸다. 이 시간까지 야근 중이었다. "나는 오늘도 회사야. 부럽다, 진짜."

"…뭐 하고 지내냐고 안 물어봐?"

"안 물어봐.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한다며. 근데 목소리가 좀 이상하다? 너 뭐 있지."

나는 서점 얘기를 할까 하다 말았다. 유나는 빠른 애였다. 서점에서 책을 골라준다는 얘기를 하면, 유나는 그게 무슨 마케팅이냐고,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냐고, 열 개쯤 물을 거고, 나는 그 열 개에 하나도 대답 못 할 거였다. 아직은 말로 정리되지 않는 무언가였다.

"별거 없어." 나는 말했다. "책 좀 읽어."

"책? 네가?" 유나가 웃었다. 그러다 잠깐 조용해졌다. 사무실 소음만 났다. 그러더니, 평소와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부럽다, 진짜로. 너는 그만뒀잖아. 나는… 그것도 못 하겠더라. 그만두면 내가 없어질 것 같아서. 우리 다 그래서 못 그만두는 거야. 근데 너는 했잖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유나가 나를 부러워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도망친 줄 알았는데, 누군가에게는 내가 용기를 낸 사람이었다. 같은 일을 두고 나는 도망이라 부르고 유나는 용기라 불렀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나도 몰랐다.

"끊자. 나 아직 한참 남았어." 유나가 다시 빠른 목소리로 돌아왔다. "아, 맞다. 너 오세혁 CD님 기억하지? 그분 요즘 더 큰 데로 옮긴다더라. 팀 새로 꾸린대. 너 같은 애 찾을걸. 아무튼 너 그거 오래 못 쉰다. 곧 근질거려서 다시 뛸걸. 그때 연락해."

전화가 끊겼다. 나는 어두운 골목에 서서, 사무실 불빛이 아직 켜져 있을 유나를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손에 든 봉투를 봤다. 『느린 편지』. 빠른 세계에 남은 친구와, 느린 책 한 권을 든 나. 우리는 같은 데서 출발했는데, 지금은 다른 속도로 서 있었다.

유나와 나는 신입 때 나란히 밤을 새우던 사이였다. 같은 회의실에서, 같은 라면을 먹으며, 같은 선배한테 깨지며. 그중 한 선배가 있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넌 사람을 읽는 눈이 있다"고 말해준 사람. 그 사람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나는 얼른 지웠다. 그 사람 생각은 오래 안 하기로 했으니까. 대신 봉투 속 책을 다시 봤다. 느린 편지. 나는 그 선배에게 한 번도 답장 같은 걸 못 했다. 이젠 부칠 데도 없는데.

✦ ✦ ✦

그날 밤, 나는 『느린 편지』를 폈다.

첫 장만 읽으려고 했다. 남자가 그래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한 장을 넘기고, 또 한 장을 넘겼다. 편지에 관한 책이었다. 빠른 시대에 느린 편지를 쓰는 사람들 이야기. 답장이 언제 올지 모르는 편지를 쓰는 마음에 대해. 어떤 문장에서 나는 멈췄다. "빠른 답을 원하는 사람은 질문을 안 한다. 답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진짜 질문을 할 수 있다."

나는 늘 빠른 답만 원했다. 그래서 진짜 질문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왜 이렇게까지 소진됐는지, 나는 나에게 한 번도 제대로 묻지 않았다. 답이 느릴까 봐. 답이 없을까 봐.

편지 쓰는 사람들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오래전 내가 손으로 편지를 썼던 걸 떠올렸다. 답장이 언제 올지 모르는 편지를. 그때는 답이 느린 게 하나도 안 무서웠다.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다. 언제부터 나는 모든 답이 즉시 와야 하는 사람이 됐을까. 메신저의 '1'이 사라지는 속도로 사람을 재는 사람이. 빠른 답을 주고받는 사이 나는 기다리는 법을 잃었고, 기다리는 법을 잃으면서 묻는 법도 잃었다. 이 책은 그걸 조용히 짚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마지막 장이었다.

나는 책을 끝까지 읽어버렸다.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남의 원고 말고, 나를 위한 책 한 권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였다. 회사에 다닐 땐 새벽 세 시까지 남의 카피를 고쳤는데, 오늘은 새벽 세 시까지 내 책을 읽었다. 같은 시간인데 완전히 다른 밤이었다.

창밖으로 골목이 어둑했다. 도시의 큰길은 이 시간에도 깨어 있을 텐데, 골목 안은 고요했다. 야근의 새벽은 늘 쫓기는 시간이었다. 마감까지 몇 시간, 잠까지 몇 시간, 늘 무언가까지 몇 시간. 그런데 오늘 새벽은 아무 데도 쫓기지 않았다. 나는 그 고요 속에서 처음으로, 새벽이 무섭지 않았다.

새벽 방, 책을 다 읽고 스탠드 앞에 앉은 다인의 뒷모습

마지막 장을 덮는데,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났다. 슬픈 책도 아니었는데. 그냥, 내가 무언가를 끝까지 했다는 게. 그것도 아무 쓸모 없는 일을, 오직 나를 위해서. 육 년 만에 처음으로 쓸모없는 일을 끝까지 한 밤이었다. 그리고 그 쓸모없음이, 그 어떤 쓸모보다 나를 살렸다.

나는 문득 그 남자가 궁금해졌다. 이 책을 나에게 정해준 사람. 그는 내가 오늘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줄 알았을까. 첫 완독이 사람을 이렇게 흔들 줄 알고 이 책을 골랐을까. 남을 그렇게 정확히 읽는 사람이, 정작 자기 책은 왜 한 장을 못 넘길까. 정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가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는 언젠가 그 사람에게 책 한 권을 정해줄 수 있을까. 그 생각은 너무 앞서간 것 같아 얼른 접었다. 그런데 접으면서도 조금 웃었다. 몇 년 만에 나는 '하고 싶은' 무언가를 떠올린 거였다. 아주 작은 거였지만, 그건 분명 내 것이었다.

책 사이에 이번에도 책갈피가 끼어 있었다. 손글씨 한 줄.

끝까지 읽으셨다면, 오늘은 이미 충분한 하루입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그리고 이번엔, 조금 오래 울었다.

3화는 2026.09.12 저녁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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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가 공개되면 이 기기로 바로 알림을 보내드려요. (계정 없이 이 기기에만)

본 소설은 창작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상호·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삽화는 AI로 생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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