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서점 — 제1화. 처방받는 사람

사표를 낸 날, 나는 내 인생을 한 줄로 줄여봤다.
직업병이다. 육 년을 카피라이터로 살면 뭐든 한 줄로 줄이는 버릇이 생긴다. 라면 하나도 한 줄로 팔아야 하고, 아파트도 한 줄, 보험도 한 줄, 남의 인생도 한 줄. 그렇게 남의 것만 줄이다가 정작 내 것을 줄이려니 한 줄이 안 나왔다. 스물아홉, 광고대행사 육 년 차, 번아웃. 그건 요약이지 카피가 아니다. 카피에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내 마음이 어디 있는지 몇 년째 몰랐다.
퇴사 면담에서 팀장은 물었다. 왜 그만두느냐고. 나는 대답을 준비해 갔는데, 그 자리에서 다른 말이 나왔다. "쉬고 싶어서요." 팀장이 웃었다. "다인아, 쉬는 것도 재능이야. 넌 그 재능이 없어." 그 말이 칭찬인지 저주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그 말을 들은 순간, 아, 이 사람도 나를 한 줄로 줄였구나 싶었다. 쉴 줄 모르는 애. 그게 육 년간 내가 완성한 나의 카피였다.
이사할 동네를 고르는 데는 하루가 걸렸다. 회사에서 멀수록 좋았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또 갈아타야 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동네. 부동산 앱을 넘기다 낯선 동네 이름에서 손이 멈췄다. 왜 거기서 멈췄는지는 그때 몰랐다. 나중에야 어렴풋이 떠올랐다. 언젠가 누가, 지치면 이런 골목에 가서 책이나 한 권 받아 오라고 했었다. 그 골목이 여기였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나는 그냥 그 이름을 골랐다. 사람은 자기가 왜 그러는지 모르면서 중요한 걸 고를 때가 있다.
육 년 동안 내가 쓴 카피가 몇 개인지는 세어본 적 없다. 다만 그 문장들이 다 남의 것이었다는 건 안다. 세탁기의 마음, 은행의 마음, 생수의 마음. 나는 사물의 마음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었다. 냉장고가 하고 싶은 말, 아파트가 하고 싶은 말. 이상하게도 그건 잘했다. 남의 마음은 한 줄로 정확히 나왔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회의실에서 밤을 새워도 한 줄이 안 나왔다. 남의 욕망은 그렇게 잘 읽으면서, 내가 뭘 원하는지는 몇 년째 백지였다.
마지막 프로젝트가 끝나던 날, 나는 화장실에서 십 분을 울었다. 잘돼서도 안돼서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느낌이 없어서 울었다. 기뻐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은 게 제일 무서웠다. 감정이 다 소진되면 사람은 기쁨부터 잃는다. 슬픔은 나중까지 남는데, 기쁨이 먼저 간다. 나는 기쁨이 언제 갔는지도 몰랐다.
이사는 사흘 만에 끝났다. 짐이 별로 없었다. 육 년을 일했는데 남은 건 원룸 하나를 겨우 채웠다. 시간을 다 어디에 썼나 세어보다 그만뒀다. 세면 후회하고, 후회하면 또 잠을 못 잔다. 나는 후회를 미루는 데도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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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동네의 첫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쉬고 싶었는데, 막상 아무 일정도 없는 밤이 되자 몸이 어쩔 줄을 몰랐다. 야근이 없는 밤을 어떻게 쓰는지 나는 잊어버렸다. 휴대폰을 켰다 껐다 했다. 업무 메신저 알림이 오지 않는 화면이 낯설었다. 누가 나를 안 찾는다는 게 이렇게 허전한 일인 줄 몰랐다. 도시는 늘 나를 찾았다. 급해요, 언제 돼요, 오늘까지요. 그 재촉이 없어지자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회사에 있을 땐 나를 증명할 게 늘 있었다. 마감, 회의, 결과물. 나는 그것들로 내가 쓸모 있다는 걸 매일 확인했다. 그런데 그게 없어지자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쓸모로만 자기를 알던 사람은 쉴 때 자기가 사라진다. 쉬는 게 무서운 진짜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는 나를 견딜 수 없어서다. 팀장 말이 맞았다. 나는 쉬는 재능이 없었다. 재능이 아니라, 쉬는 법을 아예 안 배운 거였지만.
휴대폰에 유나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대학 동기, 십 년 친구, 나와 같은 업계에 남아 아직도 갈리는 중인 애.
— 이사 잘했어? 거기서 뭐 하고 지낼 건데.
— 아무것도.
— 야, 너 아무것도 안 하는 거 삼 일이면 미쳐. 내기할래?
나는 답장을 하다 말았다. 유나 말이 맞을까 봐.
새벽 두 시, 나는 결국 밖으로 나왔다.
골목은 조용했다. 큰길로 나가면 아직 도시가 깨어 있었다. 편의점 불빛, 배달 오토바이, 늦은 택시. 그런데 골목 안쪽으로 한 블록만 들어오면 시간이 달랐다. 오래된 상가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재개발이 이 골목만 비껴간 모양이었다. 낡은 세탁소, 문 닫은 철물점, 그리고 그 끝에 불이 켜진 카페 하나. 심야 카페였다. 유리문에 '밤에도 엽니다'라고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마흔쯤 된 남자가 카운터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손님이 다 있네요." 남자가 안경 너머로 나를 봤다. "이 시간에."
"이사 왔어요. 잠이 안 와서."
"아, 저 위 원룸. 어쩐지 못 보던 얼굴이다 했네." 남자는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류 사장이라고 했다. 이 골목에서 십 년째 카페를 한다고. "이 동네가 잠 못 드는 사람들이 흘러드는 데예요. 밤에 갈 데가 없는 사람들. 그래서 밤에 열어요."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잠 못 드는 사람들이 흘러드는 데. 그렇다면 나는 제대로 흘러든 셈이었다.
"근데 잠이 정 안 오면." 류 사장이 커피를 내주며 골목 안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끝에 서점 하나 있어요. 낮에도 밤에도 가끔 불이 켜져 있는데, 거기 좀 이상한 데예요."
"이상하다니요."
"책을 자기가 못 골라요. 주인이 골라줘요. 무슨 얘기 몇 마디 나누면, 딱 한 권 갖다줘요. 그게 그렇게 잘 맞는다대." 류 사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책은 잘 안 읽어서 몰라요. 근데 우리 골목 사람들이, 힘들 때 거기 한 번씩 가더라고."
나는 창밖을 봤다. 골목 끝, 정말로 희미하게 불이 켜진 유리문이 보였다. 이런 새벽에. 나는 커피를 다 마셨다. 식기도 전에.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서점의 이름은 '가을 서점'이었다.
간판은 오래돼서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유리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형광등이 아니라 스탠드였다. 그 노란빛이 낡은 나무 서가를 비추고 있었다. 문을 밀자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그리고 냄새가 났다. 오래된 종이 냄새. 나는 그 냄새를 어디서 맡아본 것 같았는데, 어디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오래전 누군가의 방에서 나던 냄새와 닮아 있었다. 책이 많던 사람이었다. 나에게 이런 골목 서점 얘기를 해준 것도 그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 그 사람 생각은 오래 안 하기로 했으니까, 나는 그 냄새의 정체를 더 캐지 않았다.
서점은 좁고 깊었다. 서가가 양쪽 벽을 따라 천장까지 서 있고, 가운데 통로 하나. 그 끝에 낡은 나무 카운터와, 스탠드가 켜진 책상이 있었다. 책상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삼십 대 중반쯤, 큰 키, 니트 소매를 걷은 팔. 그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펼쳐진 책 한 권을 그냥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래 그 자세였던 것처럼.
"어서 오세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새벽 세 시에 손님이 오는 게 이상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찾으시는 책 있으세요?"
"아, 그게…" 나는 말을 골랐다. 뭘 찾으러 온 게 아니었다. 잠이 안 와서, 커피집 사장이 이상한 데라고 해서, 그냥. "잘 모르겠어요. 그냥 들어와 봤어요."
"잘 오셨어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오는 분들, 대부분 뭘 찾는지 몰라서 와요."
그는 카운터 쪽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름도, 무슨 일을 하는지도, 왜 이 새벽에 잠이 안 오는지도.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요즘,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뭐예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나는 잠깐 멍했다. 그런데 대답이 먼저 나왔다.
"오늘 뭘 해야 하지."
"그다음엔요?"
"…근데 뭘 해도 소용없을 것 같다."
말해놓고 나는 조금 놀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나도 몰랐으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받아 적는 사람의 얼굴. 그는 잠깐 나를 봤다. 아니, 나를 읽는 것 같았다. 나는 남을 읽어 카피를 쓰는 사람인데, 남에게 읽히는 건 처음이라 이상하게 벌거벗은 기분이었다.
"오래 그랬어요?" 그가 물었다.
"뭐가요."
"소용없을 것 같다는 거."
나는 대답을 못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랐으니까. 소용 있는 일만 하며 살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게 소용없게 느껴졌다. 소용을 따지는 사람은 결국 자기까지 소용으로 재게 된다. 나는 쓸모 있는 카피였다가 쓸모없어진 카피가 된 기분이었다. 폐기되는 문장. 그가 그런 나를 잠깐 보더니, 더 캐묻지 않았다. 캐묻지 않는 게 이 사람의 다정인 것 같았다.
"잠깐만요."
남자는 서가 사이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안쪽 깊은 데서 멈췄다가, 다시 났다. 그리고 딱 한 권을 들고 나왔다. 얇은 책이었다. 표지가 낡아서 제목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그걸 나에게 내밀었다.
"이거요."
"제가 이걸… 왜요?"
"그건 안 물어요." 남자가 말했다. "여기 규칙이에요. 왜 그 책이 필요한지는 안 물어봐요. 손님도, 저도. 그냥 한 권, 가져가서 읽으면 돼요."
나는 그 규칙이 이상하면서도 편했다. 도시는 늘 이유를 물었다. 왜 늦었어요, 왜 안 됐어요, 왜 그렇게 했어요. 이유를 대는 데 지쳐 있던 나에게, 이유를 묻지 않는 곳은 낯선 친절이었다.
"얼마예요?"
"읽고 마음에 들면, 다음에 오실 때 값을 쳐주세요. 안 맞으면 안 주셔도 되고." 남자가 책을 종이봉투에 넣었다. "여긴 한 번에 한 권만 드려요. 그것도 규칙이에요."
"왜 한 권만요?"
"두 권을 주면, 한 권은 안 읽거든요." 그가 처음으로 아주 조금 웃었다. "사람은 손에 많이 쥐면 아무것도 못 읽어요."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손에 많이 쥐면 아무것도 못 읽는다. 나는 늘 손에 열 개씩 쥐고 사는 사람이었다.
책을 받아 들고 나오는데, 문 앞에서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아까 그 펼쳐진 책. 그는 그걸 읽지 않고 그냥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장 넘기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남에게는 한 권을 척척 골라주는 사람이, 정작 자기 책은 한 장을 못 넘기고 있었다.
나가기 전에 나는 그 책상 위 책을 흘긋 봤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밑줄도, 접힌 자국도. 다만 몇 년을 그 페이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의 책 같았다. 나는 남의 원고를 하도 봐서, 오래 멈춘 문장을 알아본다. 저 사람은 저 페이지에서 멈춰 있었다. 다음 장으로 못 넘어가고. 남의 책은 척척 골라주면서 자기 책은 한 장을 못 넘기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안다. 남의 마음은 한 줄로 쓰면서 자기 마음은 백지인 사람. 우리는 어쩌면 같은 병을 반대쪽에서 앓고 있었다. 나는 그게 왜인지 궁금했지만, 여기선 이유를 묻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묻지 않았다.

✦ ✦ ✦
원룸으로 돌아와, 나는 봉투에서 책을 꺼냈다.
낡은 문고본이었다. 제목은 『멈춰도 되는 사람』. 나는 피식 웃었다. 쉴 줄 모르는 애한테 멈춰도 되는 사람이라니. 그 남자는 정말 나를 읽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 동네 오는 사람이 다 나 같은 사람이거나.
첫 장을 폈다. 그리고 반쯤 읽다가, 덮었다.
이것도 오래된 버릇이다. 나는 책을 사면 첫 장만 읽는다. 뒷장을 읽을 시간에 다른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끝까지 읽는 건 효율이 나쁜 일이라고, 언젠가부터 그렇게 배웠다. 그래서 내 책장에는 첫 장만 접힌 책이 수십 권이다. 다 읽은 책은 한 권도 없다. 남의 원고는 백 번씩 고쳐 읽으면서, 내 책은 첫 장에서 멈춘다. 이상한 일이지. 남의 문장은 그렇게 끝까지 붙잡으면서.
책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덮은 책에서 뭔가 삐져나와 있었다. 책갈피였다. 얇은 종이에, 손글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아까 그 남자의 글씨 같았다. 나는 그걸 집어 들었다. 새벽빛 아래에서, 그 한 줄을 읽었다.
당신은 지금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카피라이터로 육 년을 살면서 수천 개의 문장을 썼는데, 그중 어떤 것도 나에게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없었다. 나는 늘 남에게 "지금 사세요", "지금 시작하세요", "늦기 전에"를 팔았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문장은, 팔리지 않는 문장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그 말을 해주지 않았다. 나조차도.
문득 아까 그 남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손에 많이 쥐면 아무것도 못 읽는다고. 나는 평생 손에 많이 쥐고 살았다. 마감을, 남의 마음을, 다음 할 일을. 그래서 정작 내 손안의 나를 한 번도 못 읽었다. 이 책갈피 한 줄이, 내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끝까지 읽은 문장이었다. 열두 글자. 내 인생에서 제일 짧고, 제일 오래 걸린 완독.
그 새벽, 나는 그 책갈피를 손에 쥔 채로 처음으로 조금 울었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울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우는 것도 효율적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울음 끝에, 이상하게 몸이 조금 가벼워졌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다음 할 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누워 있었다. 천장을 봤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 남자 말대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밤이었다. 나는 그 책갈피를 베개 옆에 두고, 오랜만에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들었다. 알람 없이 잠드는 게 얼마 만인지, 그것도 세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내 가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