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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청춘 로맨스

노을 극장 — 제7화. 연락처를 물어도 될까요

2026.08.29 발행 · 전 8
마주 본 두 사람의 노을 실루엣

나는 그 실루엣을 향해 걸어갔다.

새벽 공터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그는 스크린을 다 올려놓고, 몇 걸음 물러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에 건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였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재작년, 아무도 안 온 빈 공터의 스크린을 혼자 찍었다던 그 말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없어지기 전의 이 극장을 마지막으로 한 장 담으려는 거였다. 아무도 모르게. 인사도 없이.

"이렇게 인사도 없이 가려고 했어요?"

내 목소리에 그가 돌아봤다. 이 주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볕에 더 그을렸고, 조금 야위었다. 나를 보고 그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냥, 들켰다는 얼굴을 했다.

"…하경 씨."

"이 주 동안 어디 있었어요."

"…외가에요. 그냥, 집에."

"왜 안 나왔어요."

그는 대답을 고르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카메라를 내리고, 스크린을 보며 말했다.

"나오면 더 못 떠날 것 같아서요."

나는 그 말에 걸음을 멈췄다. 더 못 떠날 것 같아서. 그러니까 그는 도망친 게 아니었다. 나오면 정이 더 들까 봐, 정이 들면 떠나기가 더 아플까 봐, 미리 자기를 여기서 떼어낸 거였다. 할머니 말이 맞았다. 떠나는 게 익숙한 애라 붙잡히는 법을 안 배웠다고. 그는 지금도 붙잡히지 않으려고, 새벽에 몰래 마지막 사진만 찍고 사라지려던 참이었다.

"그 사진, 누구 주려고 찍는 거예요?" 나는 물었다. "해성 씨 배 타면, 이 극장 사진은 아무도 안 보는데."

"…저 보려고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배 위에서, 외로울 때. 이런 여름이 있었다는 걸, 저 혼자라도 기억하려고요."

저 혼자라도. 나는 그 말에 마음이 아팠다. 이 사람은 늘 그랬다. 혼자 기억하고, 혼자 접고, 혼자 떠났다. 나눌 줄을 몰랐다. 나누면 잃을 때 더 아프니까, 처음부터 혼자 가지려 했다. 사진 한 장에 여름을 담아, 저 혼자 배 위에서 꺼내 보려고.

"그게, 해성 씨 방식이에요?" 나는 물었다. "좋아하는 거 생기면, 아프기 전에 먼저 도망가는 거."

그가 나를 봤다. 이번엔 놀란 얼굴이었다. 내가 자기를 그렇게 정확히 읽은 게 놀라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읽을 자격이 있었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니까. 나도 삼 년을 그렇게 살았으니까. 같은 병을 앓아본 사람만이 서로의 증상을 안다.

그는 다시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망칠 곳을 찾는 사람처럼. 하지만 새벽 공터에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바다와 스크린과, 그리고 나뿐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가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 여름 내내 나는 늘 반 박자 늦게 고개를 숙이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상대가 떠나게 두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물러서지 않기로, 언덕을 내려오면서 정했다.

붉은 새벽빛, 방파제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뒷모습

✦ ✦ ✦

해가 뜨기 시작했다. 바다 끝이 붉어졌다. 우리는 방파제 위에 나란히 앉았다. 오랜만이었다. 이 주 만에,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으로.

"저 원래." 해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파도를 보며. "아버지가 배 타고 나가면, 안 기다리기로 했어요. 어릴 때. 기다리면 매일이 힘드니까. 안 기다리면, 오면 반갑고 안 와도 안 슬프고. 그게 편했어요. 그래서 저는 뭐든 그렇게 해요. 안 기다리고, 안 바라고, 정들기 전에 접고."

"…네."

"근데 이번 여름은."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게 안 됐어요. 하경 씨가 릴을 잡을 때부터. 접으려고 하는데 자꾸 안 접혀서, 무서웠어요. 그래서 극장 없어진다는 핑계로, 도망친 거예요. 미안해요. 비겁했어요."

나는 그 사과를 오래 들었다. 비겁했다는 말은, 사실 제일 용감한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자기가 도망쳤다는 걸 인정하는 것. 나는 삼 년 동안 한 번도 인정하지 못했다. 나는 도망친 게 아니라 그냥 재능이 없어서 그만둔 거라고, 스스로한테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침 바다 앞에서, 자기가 겁나서 도망쳤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용기가 부러웠고, 그래서 나도 용감해지고 싶었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봤다. 붉은 새벽빛이 거기 어리고 있었다. 늘 담담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비겁을 말하고 있었다. 접는 데 선수인 사람이, 접히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나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다. 나는 삼 년째 그 한마디를 나한테도 못 했으니까. 접히지 않는다는 말. 아직 좋아한다는 말.

이번엔 내 차례였다.

"저도 도망친 사람이에요." 나는 말했다. "영화가 좋았는데, 재능 없단 말 한마디에 접었어요. 삼 년을.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여기까지 왔으면서, 한 번도 안 꺼냈어요. 찍었다가 또 별로일까 봐. 확인하는 게 무서워서, 아예 안 하는 거요. 해성 씨가 아버지 전화 안 받는 거랑 똑같아요. 확인 안 하면, 아직 괜찮은 것 같으니까."

해성이 나를 봤다.

"우리 둘 다 겁쟁이예요." 나는 웃었다. 울 것 같은데 웃음이 났다. "근데 저는 이제 안 도망치려고요. 해성 씨가 없어지는 거, 극장이 없어지는 거, 이 여름이 없어지는 거. 그냥 보내기 싫어요. 그래서 물어볼게요. 도망 안 치고."

나는 숨을 한 번 골랐다. 여름 내내 우리가 지켜온 규칙 하나를, 이제 내 손으로 깨려는 참이었다.

"해성 씨 연락처, 알려줄래요? 여름 끝나도, 저 해성 씨 계속 알고 싶어요."

✦ ✦ ✦

연락처를 묻지 않기로 한 건 그의 규칙이었다. 여름만 있을 사람들이니까, 각자 갈 길이 정해졌으니까. 그 규칙은 우리를 안 아프게 해줄 거였다. 그런데 나는 방금 그 규칙을 깼다. 안 아프기를 포기하고, 아플지도 모르는 쪽을 골랐다. 붙잡는 쪽을. 할머니가 그랬다. 붙잡는 건 지금 아니면 못 한다고.

사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여름을 다 써버린 것 같았다. 도망쳐 온 바닷마을에서,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 여름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걸 배웠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법. 붙잡는 법. 도망치지 않는 법. 재능은 없어도 이건 배울 수 있었다. 이건 재능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였으니까. 그리고 용기는, 재능과 달리, 누구나 딱 한 번은 낼 수 있는 거였다.

해성은 한참 말이 없었다. 파도가 몇 번 부서졌다. 나는 거절당할 각오도 했다. 어차피 나는 오늘 처음으로 도망치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삼 년 치는 용감했으니까. 결과가 어떻든.

"…그거." 해성이 겨우 입을 뗐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거 반칙이에요. 규칙 정한 건 난데, 깨는 건 하경 씨가 하고."

"먼저 정한 사람이 먼저 깨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가 웃었다. 처음으로, 참지 않고 웃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나는 거기 내 번호를 눌렀다. 열한 자리. 그게 뭐라고, 손이 떨렸다. 여름 내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면서도 만들지 않았던 열한 자리의 끈을, 나는 여름이 끝나기 직전에야 만들었다.

그 번호가 저장되는 걸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여름 내내 우리는 서로를 '그 사람'이라고만 불렀는데, 이제야 서로를 부를 수 있는 이름과 번호를 갖게 됐다. 부를 수 있다는 것. 찾을 수 있다는 것. 그건 생각보다 큰일이었다. 나는 삼 년 동안 아무도 안 부르고, 아무한테도 안 불리며 살았으니까.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그는 이번엔 화면을 뒤집지 않았다. 나를 한 번 보더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아버지. 네. 승선일이요. 알아요. 닷새 뒤."

짧은 통화였다. 나는 반쪽만 들었다. 그런데 그 반쪽에서, 무언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에 해성이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 이번엔… 돌아올 데를 좀 만들어놓고 갈게요. 반년 있다 돌아오면, 기다리는 사람 있게."

전화를 끊고, 그는 한동안 바다만 봤다. 눈가가 붉었다. 새벽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아버지가 뭐래요?" 내가 물었다.

"별말 안 했어요. 그냥… 잘 다녀오라고." 그가 픽 웃었다. "삼십 년 만에 처음 들었어요, 그 말. 늘 제가 먼저 안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아버지도 잘 다녀오란 말을 못 했던 거예요. 기다리는 사람한테나 하는 말이잖아요, 그거."

기다리는 사람한테나 하는 말. 나는 그가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기다려지는 사람이 됐다는 걸 알았다. 안 기다리기로 한 사람이 기다려주기로 한 순간, 그도 기다려지는 사람이 됐다. 붙잡는 건 그렇게 서로를 바꾼다.

✦ ✦ ✦

우리는 그날 강태섭을 찾아갔다.

해성과 나, 그리고 마을 청년 몇이 함께였다. 할머니도 왔다. 강태섭은 방파제에서 공사 자재를 살피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 인상을 썼다.

"또 뭐여. 상영은 안 된다니께."

"이장님." 내가 나섰다. 여름 내내 남의 앞에 나서본 적 없는 내가, 처음으로. "공사 막으려는 거 아니에요. 방파제 위험한 거, 저희도 알아요. 공사 하세요. 대신 딱 하루만요. 없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상영하게 해주세요. 삼십 년을 그냥 이렇게 끝내면, 너무 서운하잖아요."

"서운은 무슨." 강태섭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약했다.

그때 할머니가 앞으로 나섰다. 강태섭을 똑바로 봤다.

"태섭아." 할머니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장님도 아니고, 그냥 태섭아. "삼십 년 전에, 그 첫 상영 날 영사기 돌린 거 너였다. 기억나제? 우리 그이가 광목 걸고, 니가 영사기 돌리고. 마을 사람들 다 모였었어. 그날 밤."

강태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재만 봤다. 그런데 그 등이 조금 굳어 있었다.

"그 극장, 이제 없애야 하는 거 나도 알어. 위험한 거 니 말이 맞고. 근디 삼십 년 전에 니 손으로 켠 불을, 니 손으로 끄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켜주라. 마지막으로. 부탁이여."

한참 침묵이 흘렀다. 파도 소리만 났다. 강태섭은 끝내 우리를 보지 않았다. 다만 자재 쪽으로 돌아서면서,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딱 하루여. 그 이상은 없어. 사고 나면 다 니들 책임이고."

할머니가 그의 등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고맙다, 태섭아." 강태섭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런데 걸어가는 그 등이 조금 펴진 것도 같았다.

그게 허락이었다. 퉁명스러운, 그러나 분명한 허락. 나는 그 순간 강태섭이라는 사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도 이 극장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사랑해서, 차라리 자기 손으로 끝내려 한 사람. 우리 모두와 같은 종류의 겁쟁이. 다만 그의 겁은 삼십 년이나 묵어서, 이제는 호통의 모양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서는 그의 등을 보며, 나는 할머니가 아까 그를 '태섭아'라고 부른 게 마음에 걸렸다. 이장님도, 강 씨도 아니고, 태섭아. 그 호칭에는 오래된 무언가가 있었다. 삼십 년 전 광목을 걸던 젊은 부부와, 그 옆에서 영사기를 돌리던 젊은 남자 사이의 무언가가. 나는 그게 뭔지 아직 몰랐지만 알 것도 같았다. 다만 그건 그들의 여름이지 내 여름이 아니어서, 나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는 이미 높았다.

마지막 상영회 날짜를 정했다. 사흘 뒤. 해성이 승선하기 이틀 전 밤.

소식은 마을에 금방 퍼졌다. 마지막 상영회 한다더라. 그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나섰다. 배 타는 청년은 읍내에서 필름을 구해오겠다 했고, 반찬가게 할머니는 그날 국수를 말겠다 했고, 박 씨 어르신은 오래된 스피커를 손보겠다 했다. 없어질 극장의 마지막 밤을, 마을이 다 같이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이 낯설고 좋았다. 도시에서는 무언가를 혼자 시작하고 혼자 접었는데, 여기서는 다 같이 켜고 다 같이 지키려 했다.

그때 소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 갈게. 마지막 상영회. 기차표 끊었어. 네가 뭘 시작했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어." 나는 그 문자에 오랜만에 소리 내 웃었다. 여름 내내 반만 하던 이야기를, 이제 소영에게 다 보여줄 수 있게 됐다.

마을 청년들이 필름을 구하기로 했고, 할머니가 광목을 손보기로 했고, 나는—

나는 걸음을 멈췄다. 가방을 열었다. 여름 내내 넣어두기만 했던 카메라가 거기 있었다. 나는 그걸 꺼냈다. 이번엔 정말로 꺼냈다.

"뭐 해요?" 해성이 물었다.

"이 마지막 여름." 나는 카메라를 들어 렌즈 캡에 손을 얹었다. "제가 찍을게요. 해성 씨는 배 타면 이 여름 못 보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대신 찍어서, 남겨둘게요. 돌아오면 볼 수 있게."

말해놓고 나는 조금 놀랐다. 돌아오면, 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는 게. 여름만 있을 사람들이라던 우리가, 어느새 '돌아오면'을 말하고 있었다. 여름의 끝이 이별이 아니라 약속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렌즈 캡을 벗기는 하경의 손

렌즈 캡이 딸깍, 하고 열렸다. 삼 년 만이었다. 그 작은 소리가, 나에게는 어떤 영화의 시작음보다 컸다. 여름 햇빛이 렌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뷰파인더에 눈을 댔다. 그 안에, 이제 막 웃기 시작하는 해성이 있었다.

찰칵.

삼 년 만에, 나는 셔터를 눌렀다. 묵직한 소리가 아침 공기에 퍼졌다. 여름 내내 그가 나를 담던 그 소리를, 이번엔 내가 냈다. 서른여섯 칸짜리 그의 필름이 여름의 끝을 세고 있었다면, 이제 막 시작한 내 필름은 그 여름을 남기기 시작했다. 무서웠던 게 언제였나 싶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손이 먼저 배운다고, 그 사람이 그랬다. 어쩌면 내 손은 삼 년 내내, 다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본 소설은 창작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상호·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삽화는 AI로 생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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