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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청춘 로맨스

노을 극장 — 제5화. 마지막 여름

2026.08.22 발행 · 전 8
불 꺼진 스크린, 텅 빈 공터

안내문이 붙은 다음 토요일, 공터의 공기는 달라져 있었다.

공기가 달라졌다는 건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스크린도 그대로고, 바다도 그대로고, 매미도 여전히 울었다. 그런데 무언가 끝을 앞둔 자리에는 특유의 무게가 깔린다. 잔칫날 아침과 잔치 끝난 저녁의 공기가 다르듯이. 나는 언덕을 내려가면서부터 그 무게를 느꼈다. 안내문 한 장이 붙었을 뿐인데, 온 마을이 그 종이를 이미 다 읽은 것 같았다.

나는 여느 때처럼 해 질 녘에 내려갔다. 그런데 스크린 앞에 사람이 여럿 모여 있었다. 상영을 보러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마을 청년 몇과 할머니, 그리고 낯선 남자 하나. 다부진 체격에 짧고 희끗한 머리, 낡은 셔츠 차림의 오십 대 남자였다. 나는 그 얼굴을 몰랐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금방 알았다. 안내문 아래 찍혀 있던 이름. 이장 강태섭.

"그러니께 이번 주까지만 하고 접으시라고요, 어르신." 강태섭이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컸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 같았다. "공사 들어가면 여기 자재도 쌓이고 중장비도 오는데, 사람들 밤에 모여 있으면 위험해서 안 됩니다."

"삼십 년을 한 거여. 마지막 여름인디, 팔월까지는 하게 해줘."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걸 나는 처음 봤다.

"어르신. 삼십 년 한 거 아까운 거 나도 알아요. 근디 태풍철이여. 저 방파제가 지금 얼마나 삭았는지 알아요? 큰 거 한 번 오면 저기부터 무너져. 사람들 저 밑에 앉아서 영화 보다가, 파도가 방파제 넘어오면 어쩔 거요. 사람 상하고 나서 후회할 텨?"

나는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게 이상했다. 나는 저 남자가 미웠는데, 저 남자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게 제일 나쁜 종류의 반대였다. 틀린 걸 미워하기는 쉬운데, 맞는 걸 미워하기는 어렵다. 강태섭은 악당이 아니었다. 그냥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었고, 옳은 말이 우리 여름을 끝내고 있었다.

청년 하나가 나섰다. 마을에서 배를 타는 젊은 사람이었다.

"이장님, 상영이 뭐 대단한 공사판도 아니고 스크린 하나 거는 건데, 그거 하루 이틀 더 한다고 방파제가 무너집니까."

"자네가 몰라서 그려." 강태섭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 밑에 노인네들이 평상 깔고 앉아. 자네 할머니도 저기 앉으시잖어. 사고는 대단한 데서 나는 게 아니여. 별거 아닌 데서 나."

청년은 더 말하지 못했다. 강태섭의 말에는 늘 그런 게 있었다. 반박하려고 입을 열면, 그 말이 이미 누군가의 할머니를 걱정하고 있어서 말문이 막히는. 나는 그가 왜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미는지 잠깐 궁금했다. 삼십 년 된 극장을 없애는 사람치고는 너무 잘 알았다. 저 밑에 누가 앉는지, 방파제가 어디부터 삭는지, 스크린 기둥이 몇 개인지까지. 미워하려고 봤는데, 자꾸 다른 게 보였다. 저 사람도 이 극장을 오래 알아온 사람 같았다.

공터에서의 대치 — 거리를 둔 뒷모습

해성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뭐라도 말하기를 기다렸다. 극장 일을 도맡아 온 사람이니까, 뭐라도 할 말이 있을 거라고. 그런데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침묵이 나는 낯설었다. 릴을 걸 땐 그렇게 정확한 사람이, 정작 지켜야 할 순간엔 한 발 물러서 있었다.

✦ ✦ ✦

강태섭이 돌아가고, 청년들도 흩어졌다. 할머니는 평상에 앉아 한참 바다를 봤다. 그날 상영은 없었다. 흰 스크린만 바람에 힘없이 울었다.

나는 관객이 없는 극장을 처음 봤다. 늘 평상에 노인들이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상영이 없다는 소문은 참 빨리도 돌았다. 마을이 작으면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이 더 빨리 돈다. 텅 빈 평상들이 스크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관객 없는 빈 평상만큼 쓸쓸한 것도 없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다 만 자리의 모양이라서.

나는 해성에게 다가갔다. 그는 영사기 옆에 앉아 필름 케이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열지도 않고, 그냥 만지작거리기만.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는 물었다. 원망하려던 건 아닌데, 목소리에 원망이 묻었다. "해성 씨가 제일 잘 알잖아요, 이 극장."

"뭐라고 하겠어요." 그가 케이스에서 손을 뗐다. "이장님 말이 맞는데. 위험한 거 사실이고, 공사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그래도—"

"그리고 저는." 그가 내 말을 잘랐다. 조용한 목소리였는데 단호했다. "어차피 여름 끝나면 떠나요. 여기 남아서 극장을 지킬 사람도 아닌데, 제가 무슨 자격으로 붙잡아요."

나는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어차피 떠날 사람. 그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저렇게 방패로 쓰는 건 처음 봤다. 지킬 자격이 없다는 말은, 그러니까 아플 자격도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미리 접는 사람. 할머니가 그랬었다. 정들기 전에 접어버린다고. 지금 해성은 극장을, 이 여름을, 어쩌면 나까지, 한꺼번에 접으려 하고 있었다. 잃기 전에 먼저 놓아버리는 방식으로.

"극장이 없어지는 거랑, 해성 씨가 떠나는 거는 다른 문제잖아요." 나는 겨우 말했다. "떠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남은 여름은—"

"남은 여름을 뭐 하러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어차피 끝날 걸 늘려봤자, 헤어질 때 더 아프기만 해요."

그건 내가 삼 년 동안 나한테 해온 말과 똑같았다. 어차피 안 될 거 시작해서 뭐 하냐고. 어차피 재능 없는데 카메라 들어서 뭐 하냐고. 나는 그 말이 얼마나 사람을 조금씩 죽이는지 알았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아픈데, 대신 아무것도 안 남는다. 나는 그 말을 해성에게 해주고 싶었다. 해성 씨, 그러다 여름이 통째로 안 남아요. 그런데 그 말은 내가 나한테도 아직 못 해준 말이었다. 못 해준 말은 남에게도 안 나온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보더니, 받지 않고 뒤집어 놨다. 진동이 한참 울리다 멈췄다. 잠시 후 또 울렸다. 또 뒤집어 놨다.

"안 받아요?"

"아버지예요."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승선 날짜 확인하려고 그러실 거예요.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안 받아도 돼요?" 나는 물었다.

"받으면… 날짜가 진짜가 돼요." 그가 처음으로 속을 조금 보였다. "안 받으면 아직 좀 남은 것 같고. 바보 같죠. 어차피 정해진 건데."

나는 그 말이 하나도 바보 같지 않았다. 나도 달력을 안 보는 것으로 시간을 멈춰보려 한 적이 있으니까. 전화를 안 받는 것으로 승선을 미루려는 사람과, 카메라를 안 꺼내는 것으로 실패를 피하려는 사람은 결국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시간을 못 본 척하는 데 선수였다. 그런데 못 본 척한다고 시간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못 본 사이에 더 빨리 갔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는 그 필름을 떠올렸다. 서른여섯 칸 중 절반쯤 찬 필름. 그런데 오늘 그는 카메라를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노을이 그렇게 붉었는데도.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가 사진을 안 찍는다는 건, 여름을 더 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담아봤자 사라질 테니까. 사라질 걸 미리 아는 사람이 택한 건, 이번엔 셔터가 아니라 침묵이었다.

"해성 씨." 나는 뭔가 말하고 싶었다. 붙잡고 싶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도 미리 접는 데는 선수인 사람이라, 접으려는 사람을 펴는 말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 저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 내 입은 닫혔다. 남의 문장은 그렇게 잘 읽으면서, 정작 내 마음 한 줄을 소리 내 읽지 못했다. 해성은 내가 더듬거리는 걸 잠깐 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더 아팠다.

"들어가요. 늦었어요."

그는 영사기를 챙겨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를 부르지 못했다. 그의 전화번호도, 사는 집도,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연락처를 묻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 규칙은 여름을 가볍게 만들어줄 줄 알았는데, 이런 순간엔 사람을 붙잡을 끈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 규칙이 무서웠다.

어둠이 그의 등을 삼켰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부르지 못한 이름 하나가 목구멍에 걸려서, 이상하게 목이 아팠다.

✦ ✦ ✦

그 주 내내, 나는 그를 볼 수 없었다.

방파제에도, 공터에도 그는 없었다. 나는 매일 저녁 산책이라는 핑계로 내려갔지만, 스크린만 혼자 걸려 바람에 울고 있었다. 한번은 어귀의 박 씨 사진관 앞을 지나다 멈췄다. 유리문 안, 카운터 뒤 선반. 여름 내내 해성의 필름 봉투가 꽂혀 있던 그 칸이, 비어 있었다. 새 필름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그가 사진을 안 찍으니 맡길 필름도 없었다. 나는 그 빈 칸을 오래 봤다. 사람 하나가 사라지면, 그 사람이 남기던 자리들이 먼저 빈다. 필름 선반이, 영사기 옆자리가, 그리고 내 토요일이.

박 씨 어르신에게 물어볼까 했다. 그 총각 요새 어디 있냐고. 그런데 그 말이 목에 걸렸다. 나는 그의 이름 석 자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전화번호도, 집도, 심지어 성이 차 씨라는 것도 할머니한테 들어 알았다. 우리는 여름 내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봤는데, 정작 서로를 찾을 방법은 하나도 만들어두지 않았다. 연락처는 묻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 규칙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좋을 땐 그 규칙이 우리를 가볍게 해줬는데, 사라진 사람 앞에서는 그 가벼움이 잔인했다.

사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할머니에게 물으면 됐다. 할머니는 해성을 잘 아니까, 그가 어디 사는지도 알 거였다. 그런데 나는 할머니에게조차 묻지 못했다. 물어서 찾아갔다가, 그가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으면 어쩌나. 그 얼굴을 확인하느니 모르는 게 나았다. 나는 또 그러고 있었다. 확인이 무서워서 아예 안 하는 것. 카메라를 못 꺼내던 것과 똑같이. 연락처 룰은 핑계였다. 진짜 장벽은 규칙이 아니라, 여전히 나였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다 아는 눈치였다. 저녁마다 평상에 앉아 바다를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할머니가 바다를 보는 방식은 나와 달랐다. 나는 바다를 보면 자꾸 무언가를 찾았다. 고깃배 불빛이든, 수평선 너머든, 오지 않는 사람이든. 그런데 할머니는 아무것도 찾지 않는 눈으로 바다를 봤다. 이미 다 잃어본 사람의 눈이었다. 잃을 걸 다 잃고 나면 저런 눈이 되는 걸까. 나는 그 옆모습을 보며, 삼십 년 극장을 지켜온 사람이 그걸 접어야 하는 여름의 무게를 짐작했다. 나는 한 여름을 잃는 것도 이렇게 아픈데, 할머니는 삼십 년을 잃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나보다 담담했다. 오래 산 사람은 슬픔을 티 내지 않는 법을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슬픔을 티 내봤자 소용없다는 걸, 너무 여러 번 배운 건지도 몰랐다.

하루는 내가 옆에 앉자, 할머니가 지나가듯 말했다.

"해성이 저놈, 애비 닮아서 저래. 힘들면 말을 안 하고 사라져불어. 어려서부터 그랬어. 정들라 하면 지가 먼저 도망가."

"…왜요?"

"떠나는 게 익숙한 애라 그려. 붙잡히는 법을 안 배웠어. 붙잡는 법도 모르고." 할머니는 수박도 없이 그냥 바다만 봤다. "근디 그런 애일수록, 누가 진짜로 붙잡아주면 그때는 안 도망가. 못 도망가지. 그런 애들이 원래 그려."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내가 물었다.

할머니는 대답 대신 픽 웃었다. "많이 봤응께. 떠나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붙잡다 놓친 사람도. 이 나이 되면 다 봐."

그 웃음 끝에 뭔가 있었다. 오래 눌러둔 것 같은, 바다처럼 깊은 것이. 나는 더 묻지 못했다.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누가 진짜로 붙잡아주면. 그런데 붙잡는 건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었다. 나는 붙잡히는 것도, 붙잡는 것도 다 겁내는 사람이었으니까. 우리 둘 다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붙잡지 못한 채, 여름의 끝으로 각자 떠밀려 가고 있었다.

✦ ✦ ✦

토요일이 다시 왔다.

원래대로라면 상영이 있는 날이었다. 공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스크린도 그대로 걸려 있었다. 나는 어쩌면, 하는 마음으로 공터에 내려갔다. 어쩌면 그가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오늘만은 상영을 할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가망 없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하고 내려가는 저녁이 있다.

공터는 비어 있었다.

영사기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흰 스크린만 어둠 속에 걸려, 아무 빛도 받지 못한 채 바람에 조금씩 흔들렸다. 나는 텅 빈 나무 단 위에 혼자 앉았다. 우리 자리.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파도 소리만 여전했다. 여름밤은 여전히 따뜻했고, 별도 여전히 많았는데, 스크린은 꺼져 있었고 그는 오지 않았다.

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건지, 아니면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나도 모른다. 매미가 울었다. 여름이 기울 때 우는, 그 지친 울음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 여름을 아무것도 안 하며 흘려보내려던 내가 미웠다. 아무것도 안 하는 사이,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여름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가방 안에서 카메라가 묵직하게 걸렸다. 이번에도 나는 꺼내지 않았다. 꺼내서 뭘 찍겠는가. 아무도 없는 빈 공터를? 꺼진 스크린을? 그런데 문득, 해성이 재작년에 아무도 안 온 빈 공터의 스크린을 찍었다던 말이 떠올랐다. 비 오는 날, 혼자 스크린을 세우고. 그때 나는 그게 외롭지 않은 뒷모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 어쩌면 그건 외로워서 찍은 게 아니라 외롭지 않으려고 찍은 거였다. 사라지는 걸 그냥 보내지 않으려고. 무언가를 남겨두면, 그건 아주 없어진 건 아니게 되니까.

빈 스크린 위로 밤하늘이 내려앉았다. 저기 한때 여름이 상영됐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상영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텅 빈 화면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무언가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게 슬픔인지, 아니면 처음 느껴보는 다른 무엇인지, 그날 밤엔 알 수 없었다.

본 소설은 창작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상호·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삽화는 AI로 생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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