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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청춘 로맨스

노을 극장 — 제4화. 필름 속의 여름

2026.08.16 발행 · 전 8
노을 지는 방파제를 걷는 두 사람

셔터는 끝내 눌리지 않았다.

한참을 겨누고 있던 해성이, 카메라를 천천히 내렸다.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조금 멋쩍게 웃었다. 그 사람이 웃는 걸 그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안 찍었어요?"

"아껴뒀어요." 그가 카메라를 도로 목에 걸며 말했다. "제일 좋은 순간에 쓰려고. 아직 그 순간이 아닌 것 같아서."

제일 좋은 순간.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 못했다. 물으면 그 순간이 언제인지 정해야 할 것 같았고, 정하면 그 순간이 지나가버릴 것 같았다. 어떤 건 정하지 않아야 오래간다. 나는 그걸 그 여름에 배우는 중이었다.

해성은 영사기를 챙기고, 스크린의 한쪽 끈을 느슨하게 풀어 접었다. 나는 옆에서 릴을 케이스에 담았다. 손이 알아서 움직였다. 우리는 별말 없이 정리를 마쳤다. 별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됐다는 걸, 나는 그 침묵의 편안함으로 알았다.

할머니는 먼저 올라갔다. 가면서 "너무 늦게 다니지 마라" 한마디를 남겼는데, 그 말투가 어쩐지 다 안다는 투여서 나는 괜히 딴청을 부렸다. 할머니가 언덕을 오르는 뒷모습이 어둠에 묻혔다. 작고 굽은 등이었다. 저 등이 삼십 년간 이 극장을 지켜왔다고 생각하니, 나는 아직 오지도 않은 여름의 끝이 벌써 조금 슬펐다. 정리를 끝내고 공터를 나서는데, 해성이 큰길 쪽이 아니라 방파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에 안 가요?"

"방파제 한 바퀴 돌고 갈래요?" 그가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밤바다, 이 시간이 제일 좋아요."

나는 잠깐 망설였다. 망설임의 정체는 알고 있었다. 이건 상영이 아니었다. 릴을 잡는 일도, 극장 일을 돕는 일도 아니었다. 그냥 두 사람이 밤에 방파제를 걷는 일. 아무 명분도 없는 일. 나는 명분 없는 일을 오래 겁내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발이 먼저 움직였다. 손이 머리보다 먼저 배우듯, 발도 마음보다 먼저 걸었다.

✦ ✦ ✦

방파제는 길고 낮았다. 한쪽은 검은 바다, 한쪽은 잠든 마을. 가로등이 띄엄띄엄 서서 노란 웅덩이를 만들었고, 우리는 그 웅덩이들을 하나씩 밟으며 걸었다. 파도가 방파제 아래에서 규칙적으로 부서졌다. 낮의 바다는 시끄러운데 밤의 바다는 낮은 목소리로만 말한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오래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 말.

해성이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사진관 봉투였다. 박 씨 어르신 가게에서 본 그 봉투.

"볼래요?" 그가 봉투를 내밀었다. "지난 여름들이에요."

가로등 아래 펼쳐 든 여름 사진들

나는 봉투에서 사진을 꺼냈다. 가로등 아래에서 한 장씩 넘겼다. 노을 극장의 스크린, 평상에 앉은 사람들의 뒷모습, 어판장의 새벽, 마을 골목의 빨래, 방파제에 앉아 조는 노인. 특별한 게 하나도 없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 보게 됐다. 사진 속의 여름은 이미 다 지나간 여름인데, 지나갔다는 걸 아니까 더 반짝였다.

한 장에 오래 머물렀다. 노을 극장의 스크린이 텅 빈 채로 분홍빛을 받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람도 없고 영화도 없이, 그냥 빈 스크린 하나. 그런데 그 빈 화면이, 내가 본 어떤 완성된 영화보다 좋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다 있는 것 같았다.

"이거 좋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그거 재작년 거예요. 그해 여름은 비가 많이 와서 상영을 세 번밖에 못 했어요." 해성이 사진을 흘긋 보고 말했다. "비 오는 날, 스크린만 걸어놓고 찍었어요. 아무도 안 왔는데."

아무도 안 왔는데 스크린을 걸고 그걸 찍은 사람. 나는 그 장면을 상상했다. 빗속에, 텅 빈 공터에, 혼자 스크린을 세우고 셔터를 누르는 사람. 외로운 장면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외롭지 않았다. 그건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뒷모습을 오래 부러워했던 것 같다.

"매년 여름 여기 와서 찍어요?"

"어릴 때부터요. 방학이면 외가에 맡겨졌거든요. 아버지가 배를 타서, 오래 집을 비웠어요. 엄마 혼자 저를 못 봐서, 여름이면 여기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마음이 쓰였다. 아버지가 배를 타서 오래 집을 비웠다. 그 한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여름이 들어 있을지, 나는 짐작만 했다.

"아버지 안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죠. 근데 반년씩 없으니까, 나중엔 보고 싶어하는 것도 지쳐요. 그래서 그냥… 안 보고 싶어하기로 했어요. 그게 편하니까."

안 보고 싶어하기로 했다. 나는 그 문장에서 멈칫했다. 그건 내가 영화를 대하는 방식과 똑같았다. 좋아하다 지치면, 아예 안 좋아하기로 한다. 그게 편하니까. 상처받느니 미리 접는다. 해성은 아버지에게 그걸 배웠고, 나는 재능이라는 것에게 그걸 배웠다. 우리는 다른 학교를 나왔는데 같은 걸 배운 사람들이었다.

"근데 왜 또 배를 타요?" 나는 물었다. "그렇게 지쳤으면서."

해성은 걸음을 잠깐 늦췄다. 바다 쪽을 봤다.

"모르겠어요. 익숙해서인가. 아버지가 걷던 길이라 그냥 나도 걷는 건가. 아니면…" 그가 잠깐 말을 골랐다. "떠나는 게, 남는 것보다 쉬워서요. 남으면 정들고, 정들면 잃으니까. 떠나는 사람은 잃을 게 없잖아요."

떠나는 사람은 잃을 게 없다. 나는 그 말을 반박하고 싶었다. 떠나는 사람도 잃어요. 남겨질 사람의 얼굴을, 다시 못 볼 여름을, 찍어둔 사진 속에서만 남을 순간을. 하지만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하려면 내가 이미 그의 무언가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으니까. 나는 아직 그걸 인정할 준비가 안 돼 있었다.

✦ ✦ ✦

우리는 방파제 끝 등대 아래 앉았다. 해성이 가방에서 사이다 두 캔을 꺼냈다. 이번에도 미지근했다.

"또 미지근한 거."

"하경 씨가 좋아한다면서요."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소한 기억이 자꾸 걸렸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사소한 걸 다 기억할까. 사소한 걸 기억하는 사람은, 사소한 걸 소중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캔을 땄다. 치익. 파도 소리에 그 작은 소리가 섞였다.

우리는 꿈 얘기를 했다. 정확히는, 접어둔 꿈 얘기를. 나는 영화를, 그는 사진을. 그는 배를 타면 육 개월 동안 태평양의 노을을 찍겠다고 했다. 배 위에서 보는 노을은 사방이 다 노을이라, 여기랑 완전히 다르다고.

"사방이 다 노을이면 어디를 찍어요?" 내가 물었다.

"그러게요. 그래서 더 어려워요. 여기선 노을이 저기 한 군데 있으니까 프레임이 정해지는데, 바다 한가운데선 사방이 다 노을이라 뭘 버려야 할지를 몰라요."

"버리는 게 프레임이죠." 내가 말했다. 오랜만에 영화 얘기하듯 말이 나왔다. "다 담으려고 하면 아무것도 안 담겨요. 뭘 안 보여줄지를 정하는 게 프레임이에요."

해성이 나를 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 시선이 느껴졌다.

"하경 씨, 방금 되게 영화 하는 사람 같았어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누가 나를 '영화 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접어둔 게 잠깐 펴지는 소리가, 내 안 어딘가에서 났다.

나는 그 얘길 들으며, 그가 없는 이 방파제에서 매일 노을을 볼 나를 잠깐 상상했다. 상상하다 그만뒀다. 그런 상상은 위험하다. 그리움을 미리 연습하는 일이니까.

"하경 씨는요." 해성이 물었다. "영화, 진짜 접은 거예요?"

나는 사이다 캔을 만지작거렸다. 이 질문을 소영 말고 다른 사람에게 받은 건 처음이었다.

"…모르겠어요. 접었다고 생각했는데, 카메라를 아직 안 버렸거든요. 가방에 넣어서 서울에서 여기까지 들고 왔어요. 찍지도 않으면서."

"왜 안 찍어요?"

"무서워서요." 나는 처음으로 그 단어를 입 밖에 냈다. "찍으면, 또 별로일까 봐. 별로인 걸 확인하느니 안 찍는 게 나아요. 안 찍으면 적어도 나쁜 건 아니니까."

해성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바다를 보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그물은 찢어질 걸 알고도 던지는 거라고. 안 던지면 아무것도 안 걸리니까. 찢어진 그물은 기우면 되는데, 안 던진 그물은 기울 것도 없다고."

찢어질 걸 알고도 던지는 것. 나는 그 말을 마음에 오래 담았다. 나는 삼 년째 그물을 품에 안고만 있는 사람이었다. 찢어질까 봐, 아무것도 안 걸릴까 봐. 그러는 사이 여름이 세 번 지나갔다.

"해성 씨는 안 무서워요? 필름 다 쓰면 여름 끝나는 거."

"무섭죠." 그가 담담하게 웃었다. "근데 안 찍으면 여름이 아예 안 남잖아요. 무서운 거랑 안 남는 거 중에 고르라면, 저는 무서운 쪽이요."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소영이었다. 나는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방파제 쪽으로 걸으며 전화를 받았다.

"살아 있냐. 목소리가 왜 이렇게 들떴어?"

"안 들떴어."

"들떴어. 파도 소리 나네. 너 지금 밤바다야? 혼자?"

"…산책 중이야."

"혼자냐고."

나는 대답을 못 했다. 대답을 못 한 게 대답이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소영이 숨을 들이켰다.

"유하경. 그래서, 연락처는 받았어?"

"…아니."

"안 받았지. 왜 안 받아. 좋으면 받아야지."

"여름만 있을 사람이야. 여름 끝나면 배 타. 서로 연락처 안 묻기로 했어."

"그게 무슨 미친 규칙이야." 소영이 어이없어했다. "야, 그건 안 다치려고 미리 붕대 감는 거야. 다치지도 않았는데. 너 또 그러네. 진짜 또 그러네."

나는 전화를 오래 붙잡고 있지 못했다. 끊고 돌아보니, 등대 아래 해성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목에 걸린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이번엔 망설임이 없었다.

찰칵.

묵직한 셔터 소리가 파도 위로 떨어졌다. 나는 그 소리를 온몸으로 들었다. 서른여섯 칸 중 한 칸이, 방금 나로 채워졌다. 여름의 하루치를 앞당기면서. 첫 상영 날 그가 눌렀던 건 노을이었고 나는 그 앞에 우연히 서 있었을 뿐인데, 이번엔 노을도 스크린도 없이 온전히 나 하나였다.

"방금 왜 찍었어요."

"제일 좋은 순간이라서요." 그가 카메라를 내리며 말했다. "아까 극장에선 아니었는데, 지금은 맞는 것 같아서."

전화를 끊고 돌아보는 나. 그게 그 사람에게는 제일 좋은 순간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미지근한 사이다만 한 모금 마셨다. 뺨이 뜨거웠다. 밤바다 바람에도 식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파도가 몇 번이나 부서졌다. 어깨와 어깨 사이가 한 뼘쯤이었는데, 그 한 뼘이 자꾸 신경 쓰였다. 좁히고 싶은데 좁히지 못하는 한 뼘. 여름밤은 길었고, 나는 그 밤이 더 길었으면 했다. 처음으로, 시간이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 하며 흘려보내려던 여름이었는데, 이제 나는 그 여름을 붙잡고 싶어 하고 있었다. 붙잡고 싶다는 마음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도 모르고.

✦ ✦ ✦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가까웠다. 좋은 시간은 늘 거리를 줄인다. 우리는 여전히 별말이 없었지만, 그 침묵은 올 때와 달랐다. 뭔가 시작되려는 침묵이었다. 나는 집에 가면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지 벌써 골라두고 있었다. 미지근한 사이다, 그물 얘기, 셔터 소리, 좁히지 못한 한 뼘.

그런데 그 좋은 밤을, 방파제 초입의 가로등 하나가 망쳐놓았다.

난간에 묶인 공사 안내문

가로등 아래 난간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낮에는 없던 것이었다. 코팅된 안내문이 케이블타이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나는 무심코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읽었다. 관공서의 딱딱한 글씨체. 상단에 굵은 글자.

방파제 보강 공사 안내 / 공사기간: 8. 31. ~ / 부지 정비 대상: 방파제 인접 공터 일원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담당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장 강태섭. 도장까지 찍혀 있었다.

부지 정비 대상, 방파제 인접 공터. 그러니까 노을 극장이 서 있는 그 공터. 팔월 삼십일일부터. 나는 그 날짜를 두 번 읽었다. 팔월 삼십일일. 그건 해성의 필름이 다 감기는 날, 그가 배를 타는 날이기도 했다. 여름의 끝에 두 가지가 한꺼번에 사라지도록 정해져 있었다. 이 극장과, 이 사람이.

옆에서 해성이 안내문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의 옆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반쯤 굳어 있었다. 아까 방파제에서 웃던 얼굴이 아니었다. 여름 끝을 아는 사람의 얼굴이, 이제 그 여름 끝에 날짜까지 붙은 걸 본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할머니는… 알아요?" 내가 물었다.

우리는 안내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아무도 먼저 걷지 않았다. 코팅된 종이 위로 가로등 불빛이 반사됐고, 그 반질반질한 표면이 이상하게 잔인했다. 슬픈 소식은 늘 이렇게 사무적인 얼굴로 온다. 딱딱한 글씨체와 도장 하나로.

"우리 극장, 없어지는 거예요?" 나는 '우리'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썼다. 언제부터 그게 우리 극장이 됐는지도 모르면서.

"…삼십 년을 했는데." 해성이 낮게 말했다. "종이 한 장으로 없어지네요."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묻어 있었다. 늘 담담하던 사람이, 조금 전 그물 얘기를 하던 사람이, 지금은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나는 그 젖은 목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못 들은 척하는 게 그 사람을 위한 배려 같아서.

해성은 카메라를 들지도 않았다. 사라질 것들을 찍는 사람이, 정작 지금 사라지려는 것 앞에서는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어떤 건 너무 아파서 못 찍는다는 걸. 필름에 담아버리면 진짜로 사라지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

파도가 방파제 아래에서 부서졌다. 여름은 아직 한창인데, 난간에 붙은 종이 한 장이 그 여름의 끝을 벌써 못박아두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언덕길에서, 나는 자꾸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 노을 극장의 스크린이 흰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팔월 삼십일일이 지나면 저 자리엔 아무것도 없을 거였다. 스크린도, 영사기도, 우리 자리도. 그리고 그 사람도. 나는 처음으로 여름이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 여름한테,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었다.

5화는 2026.08.22 저녁에 이어집니다.
본 소설은 창작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상호·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삽화는 AI로 생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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