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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로맨스

새벽 세탁소 — 제3화. 40분의 대화

2026.08.11 발행 · 전 8
이불 보따리를 든 금례와 세탁기 앞의 두 사람

기다림에도 자세가 생긴다는 걸 나는 그 주에 알았다.

월요일의 기다림은 등을 곧게 펴고 있고, 수요일의 기다림은 조금 구부정하고, 일요일 밤의 기다림은 거의 엎드려 있다. 화요일이 멀수록 자세가 무너지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하는 순간 이 기다림에 이름이 붙을 테고, 나는 아직 그 이름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됐으니까.

일주일 내내 나는 두 번째 추측을 고르며 살았다.

첫 추측을 성급하게 써버린 대가였다. 빵집,이라고 말해버린 순간 나에게 남은 카드는 삼십오 일 동안 다섯 장뿐이었고, 나는 그 다섯 장을 어디에 쓸지 교정지 여백에 적었다 지웠다 했다. 무엇을 여는지 말고 물을 수 있는 것들. 왜 새벽에만 빨래를 하는지. 왜 셔츠는 늘 흰색인지. 왜 눈을 감고 앉아 있는지. 적고 보니 전부 추측이 아니라 그냥 궁금한 것들이었다. 게임의 규칙과 무관하게,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질문이 쌓이고 있었다.

마감은 마감대로 돌아갔다. 경제경영서의 재교가 끝났고, 에세이 한 권이 새로 들어왔다. 에세이는 교정자에게 제일 위험한 장르다. 저자의 문장이 자꾸 내 얘기를 해서, 붉은 줄을 긋다 말고 한참을 앉아 있게 된다. 이번 원고의 저자는 이렇게 썼다. "사람이 무언가를 계속 기다리게 되면, 기다림 그 자체가 생활의 골조가 된다." 나는 그 문장에 아무 표시도 하지 않고 오래 봤다. 달력의 동그라미가 하나에서 두 개가 되어 있었다. 첫 동그라미의 날이 오기도 전에, 나는 그다음 화요일에까지 미리 동그라미를 쳐둔 것이다. 기다림이 기다림을 예약하고 있었다.

목요일 오후에는 반찬가게에 들렀다. 냉장고가 비어서였고, 그건 사실이었고, 다만 온전한 사실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진미채를 담으면서 나를 흘끔 보더니 요즘 낯빛이 폈다고 했다. 지난달까지는 반쪽이라더니. 나는 마감이 하나 끝나서 그렇다고 했고, 할머니는 마감 같은 소리 하네,라고 했다. 계산을 하는데 할머니가 봉지에 뭔가를 하나 더 넣었다. 뭐냐고 물으니 대답이 이랬다. "요즘 새벽에 잘 돌아댕기는 사람은 잘 먹어야 혀." 나는 새벽에 돌아다니는 걸 들킨 건지 뭔지 알 수 없어서 그냥 고맙다고 했다. 이 골목에서 할머니 모르게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걸, 그때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어야 했다.

그리고 화요일 새벽. 첫 동그라미의 날이 왔다.

✦ ✦ ✦

"빌리겠다는 거, 정했습니다."

그 사람은 내 세탁기가 돌기 시작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나는 벤치에 앉으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만들었다. 일주일 동안 세영이 궁금해 죽으려던 그 문제의 답이 지금 나오는 참이었다.

"뭔데요?"

"눈이요."

"…네?"

"교정 보는 눈. 문장 하나만 봐주세요."

그 사람은 수첩을 한 장 찢어 내밀었다. 각진 글씨. 메모지에서 본 그 글씨였다. 찢은 자리 위쪽, 수첩에 남은 페이지 귀퉁이에 오늘 날짜의 숫자가 보였다. D-29. 나는 못 본 척하는 데 이제 능숙해져야 했는데, 그 사람이 내 시선을 따라왔다.

"네. 이십구 일 남았습니다."

"…물어본 적 없는데요."

"물어볼 것 같아서요."

종이에는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새벽에 문을 엽니다. 천천히 오십시오.

"어디에 쓰는 문장인지는 안 알려주셔도 돼요?"

"게임 중이니까요. 문장만 봐주세요."

나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남의 문장을 보는 것은 내 직업이고, 나는 내 직업 앞에서 제일 침착해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두 문장 앞에서는 계량컵 없이 세제를 붓는 기분이 됐다. 나는 침착함을 수습하고 문장을 읽었다. 두 번, 세 번.

"틀린 데는 없어요. 문법적으로는."

"문법적으로는."

"근데 '오십시오'가… 너무 무거워요. 새벽에 문을 여는 곳이면, 오는 사람도 새벽의 사람들일 거잖아요. 밤새 하십시오, 하지 마십시오, 그런 소리를 듣고 온 사람들. 새벽의 사람들은 명령형에 지쳐 있달까요. '천천히 오세요' 정도가 맞아요. 아니면."

"아니면?"

"'천천히 와요.' …이건 너무 갔나."

그 사람은 종이를 돌려받아 한참 내려다봤다. 그리고 볼펜으로 뭔가를 고쳐 적었다. 어느 쪽으로 고쳤는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교정비는 뭘로 드리면 됩니까."

"세제 한 컵이면 돼요. 저번에 빌린 거."

"그건 안 갚아도 된다고 했는데."

"그럼 저도 이 교정비 안 받을게요. 우리 이러다 서로 빚만 쌓이겠어요."

"그러네요."

그 사람은 그러네요,라고 말하면서 조금도 곤란해 보이지 않았다. 빚이 쌓이는 것을 반기는 채무자처럼. 나는 그 표정을 못 본 척하고 교정지를 꺼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사람이 말을 이었다.

"보리차는 여전히 드세요?"

"…네?"

"저번에 커피 끊었다고 하셨는데. 잘 지켜지나 해서."

나는 잠깐 벙쪘다. 그런 얘기를 했었나. 했었다. 지난주에, 텀블러를 꺼냈을 때 흘러가는 말로. 심장이 남아나지 않아서 사 년 전에 끊었다고, 스치듯 한 문장. 나도 잊고 있던 문장이었다. 그 사람은 그걸 일주일 동안 보관하고 있다가 지금 꺼낸 것이다. 다림질까지 해서.

"…지켜져요. 오늘도 끓여놓고 나왔어요."

"대단하네요. 저는 커피를 못 끊어서."

"새벽에 일하시나 봐요."

말해놓고 아차 했다. 예,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 규칙 위반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규칙을 지적하는 대신 잠깐 웃고는, 규칙에 없는 방식으로 대답했다.

"새벽이 제일 조용해서요. 뭘 하기에."

우리는 그 뒤로 삼십 분쯤, 세탁기 도는 소리 위에서 드문드문 이야기했다. 대화라기보다 문장을 주고받는 캐치볼에 가까웠다. 던지고, 받고, 사이에 침묵이 있고, 침묵이 어색해지기 직전에 다음 공이 왔다. 그 사람의 공은 이상한 데로 왔다. 요즘 보는 원고는 어떤 책이냐고 묻길래 에세이라고 했더니, 에세이를 교정하는 건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다. 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니고, 에세이를 교정하는 기분.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남의 일기에 빨간 줄 긋는 기분이에요. 죄책감이 좀 있어요."

"그래도 긋습니까?"

"긋죠. 그게 일이니까. 근데 가끔 문장이 맞는데도 긋고 싶을 때가 있어요. 너무 맞는 말이라서."

"오늘도 그런 문장이 있었어요?"

있었다. 기다림이 생활의 골조가 된다던 문장. 나는 그 문장 얘기를 하는 대신 어쩌다 출판사를 나왔는지 말하게 됐다. 어쩌다,가 정확했다. 그 사람이 물은 것도 아닌데 문장이 저 혼자 굴러갔다. 회사가 싫었던 게 아니라 회식이 싫었다고. 정확히는 회식에서 서로의 인생을 물어보는 순서가 싫었다고. 어디 살아요, 애인은 있어요, 부모님은 뭐 하세요. 물음표가 포크처럼 날아오는 시간들. 그래서 물음표가 없는 직업을 골랐다고. 원고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까.

말하면서 나는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걸 알았다. 이건 세영도 술이 두 잔 들어가야 듣는 얘기였다. 등에서 익숙한 신호가 왔다. 그만, 여기까지, 문장 회수. 사 년 동안 잘 작동해 온 경보였다. 나는 문장을 도로 주워 담는 대신 화제를 셔츠로 돌렸고, 왜 늘 흰 셔츠냐고 물었고, 그 사람이 대답하기 전에 문에서 종이 딸랑 울렸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 종소리가 원망스러웠다. 그 사람은 분명 대답을 시작하는 얼굴이었다.

반찬통을 건네는 손

✦ ✦ ✦

"어이구, 오늘은 둘이 나란히 앉었네."

이불 보따리가 먼저 들어오고, 그 뒤로 반찬가게 할머니가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골목의 단골이 새벽 세탁소에서 마주치는 건 처음이었다. 할머니는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보따리를 5번 세탁기 앞에 부렸다.

"할머니, 거기 이불 넣으면 안 된대요. 탈수 때 흔들려서."

"알어. 그래서 여따 넣는 겨."

"…네?"

"흔들리는 통이 이불을 잘 빨어. 사장이 뭘 몰러."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태연히 이불을 5번에 밀어 넣었다. 나는 사장님의 세 가지 규칙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지켜봤다. 규칙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무너지는 거였다. 사십 년쯤 산 사람이 와서, 알어, 한마디 하면.

이불이 돌기 시작하자 할머니는 보따리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스테인리스 반찬통 두 개였다. 하나는 나에게 왔다.

"콩자반이여. 얼굴이 반쪽이 됐어."

"할머니, 저 얼굴 안 반쪽이에요. 사 년째 이 얼굴이에요."

"그러니께 사 년째 반쪽이지."

반박이 불가능한 논법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그 사람 앞으로 갔다.

"총각도. 이건 멸치볶음이여."

그 사람이 얼떨결에 반찬통을 받았다. 나는 그 광경이 이상해서 봤다. 할머니가 저 사람을 안다. 단골에게만 반찬을 쥐여주는 사람인데.

"고맙습니다. 저번 것도 잘 먹었습니다."

저번 것도. 나는 그 네 글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 사람도 단골이라는 뜻이었다. 낮의 골목에서, 내가 자는 시간의 골목에서, 이 두 사람은 이미 아는 사이였다는 뜻이었다. 할머니는 반찬통을 다 돌리고 나서 벤치 한가운데에 앉았다. 정확히 나와 그 사람 사이였다. 그리고 도는 이불을 바라보며, 아주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둘이 사귀는 겨?"

"아니요."

대답이 겹쳤다. 겹친 게 더 수상했다. 할머니는 딴청을 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아니면 아닌 거지."

침묵. 세탁기 세 대가 도는 소리. 나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교정지를 폈고, 그 사람은 수첩을 폈고, 할머니는 그 꼴을 양쪽으로 한 번씩 보더니 나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속삭임이라기에는 세탁소가 다 울리는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그 총각 빵 굽는 사람이여."

"…네?"

"앞치마 총각. 새벽마다 골목에서 빵 냄새 나는 거, 저 총각이여."

나는 그 사람을 봤다. 그 사람은 수첩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곤란한 표정이라기엔 체념이 섞였고, 체념이라기엔 웃음이 묻어 있었다. 할머니는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어떻게 되든 관심 없다는 듯 이불만 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맞춰졌다. 밀가루 얼룩. 화상 같던 팔뚝의 흉터. 아무 냄새도 안 나는 세제 — 빵 냄새를 지키려고. 새벽이 제일 조용해서요, 뭘 하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화요일마다 세탁소에 왔던 그 냄새. 골목 안쪽 어디선가 새어 나와, 저 사람의 옷과 머리카락과 하루에 배어서, 세탁소까지 함께 왔던 것이다. 나는 두 달 동안 냄새의 출처를 옆에 두고, 그것도 모자라 골목까지 뒤지고 다닌 셈이었다.

"…반칙이에요, 이거."

내가 겨우 말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그러게요. 심판 없는 게임의 한계네요."

"저 아직 정답 확정 안 한 거로 할게요. 빵 굽는 사람인 건 알겠는데, 뭘 여는지는 못 들었으니까. 빵집인지 아닌지는 오픈하는 날 확인할래요."

"…끝까지 하시네요, 게임."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예요."

"규칙 만든 사람보다 열심이시고."

할머니가 우리 대화를 한 귀로 들으며 코웃음 비슷한 걸 쳤다.

"둘이 하는 짓이 똑같네. 될 일도 어렵게 하는 거."

"할머니는 저 총각을 어떻게 아세요?"

"단골이니께 알지. 새벽마다 우리 가게 앞을 쓸어."

"…가게 앞을요? 왜요?"

"몰러. 부지런한 게지.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게."

그 사람이 헛기침을 했다. 칭찬을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의 헛기침이었다. 할머니는 그 헛기침도 못 들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 도는 이불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러 가면서, 지나가는 말의 형식으로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놓고 갔다.

"새벽에 굽는 빵이 제일 정직혀. 아무도 안 보는 시간에 굽는 거니께."

나는 그 문장을 교정할 수 없었다. 문법도 맞고, 내용도 맞고, 무엇보다 저 문장에는 사십 년 치 근거가 있었다.

✦ ✦ ✦

그 사람의 세탁기가 먼저 끝났다. 알림음이 울리자 할머니가 먼저 말했다. "총각 빨래 다 됐네." 그 사람은 빨래를 갰다. 탁, 탁. 할머니는 그 손놀림을 유심히 보더니 한마디 얹었다. "개는 폼이 장사꾼이여. 저건 남한테 내놓는 사람 손이지." 그 사람의 귀가 조금 붉어진 것을, 나는 봤고, 못 본 것으로 처리했다.

그 사람은 오늘, 나가는 길에 문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음 주엔 정산할 게 두 개네요. 세제하고, 교정비하고."

"안 받는다니까요."

"제가 갚고 싶어서요."

문이 닫혔다. 할머니는 건조기 앞에서 그 뒷모습을 보다가 나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다 말한 얼굴이어서, 나는 교정지로 시선을 피했다. 할머니의 이불이 다 돌 때까지 우리는 각자의 기계 앞에 있었다. 헤어질 때 할머니가 콩자반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통은 다음 주에 갖고 와. 그래야 또 주지." 반찬통이라는 게 원래 그런 물건이었다. 비워서 돌려줘야 하고, 돌려주면 다시 채워지는. 이 골목의 관계는 전부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모양이었다. 세제도, 교정비도, 반찬통도. 빚이라는 이름의 약속들.

빨래를 다 마치고 세탁소를 나섰을 때, 골목에는 빵 냄새가 있었다.

여느 화요일의 그 희미한 한 줄기가 아니었다. 오늘은 골목 전체가 옅게 데워져 있었다. 갓 구운 것의 냄새. 버터와 밀가루와, 이름을 모르는 따뜻한 것들의 냄새. 새벽 네 시의 골목에서 그 냄새는 거의 사건이었다. 나는 빨래 바구니를 안고 서서 냄새의 방향을 가늠했다. 큰길 쪽이 아니었다. 반대편. 문 닫은 문구점 쪽. 그 사람이 늘 꺾어 들어가던 방향.

집은 큰길 쪽이었다. 빨래는 무거웠고, 새벽 공기는 눅눅했고, 나는 내일까지 넘겨야 하는 에세이가 삼십 페이지 남아 있었다. 돌아서야 할 이유가 세 개, 걸어갈 이유는 냄새 하나. 교정자라면 당연히 근거가 많은 쪽에 붉은 동그라미를 쳐야 한다.

나는 문구점 쪽으로 걸었다.

걸으면서 나는 나에게 설명할 문장을 준비했다. 산책이야. 소화도 시킬 겸. 어차피 밤샘인데 삼십 분쯤이야. 전부 성공적이지 못했다. 설명이 성공하지 못하는 걸음이 두 주째 이어지고 있었고, 이상한 건, 그게 싫지 않았다. 냄새는 걸을수록 진해졌다. 골목이 좁아지고, 담장이 낮아지고, 어디선가 오븐 타이머 소리 같은 것이 아주 작게 들린 것도 같았다.

모퉁이 하나만 더 돌면 되는 지점에서, 나는 잠깐 멈춰 섰다.

본 소설은 창작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상호·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삽화는 AI로 생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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